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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만나는 한국 토착 사상 기행 - 12 | 천지은 교도(원불교출판사 편집장, 남중교당)

“높고 낮고 크고 작은 것은 없습니다”

by 관리자 posted Jun 2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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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다 보면 새롭게 보이는 문장들이 있다. 시대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통하는 무언가가 분명 있다. 수운의 은적암 시절과 관련하여 여러 날 이런저런 책을 뒤적거리다가, 『(이야기동학비사) 만고풍상 겪은 손』(이윤영 지음)을 읽으면서 마치 심 봉사가 눈 뜨듯 나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물론 다른 이들의 생각과는 별개로 내가 받는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수운이 남원 은적암에 머물던 어느 날, 선국사의 송월당(松月堂)이라는 노스님이 찾아온다. 송월당은 그동안 수운을 지켜보면서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떤 인물인가를 시험도 하고 싶었고, 또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궁금했다. 노승은 수운에게 묻는다.

 

  “선생은 불도(佛道)를 하십니까?”, “나는 불도를 좋아하지요.”, “그러면 왜 중이 되지 않으셨소?”, “중이 아니면서 불도를 깨닫는 것이 더욱 좋지 않습니까?”, “그러면 유도(儒道)를 하십니까?”, “유도는 좋아하나 유생은아니요.”, “그럼선도(仙道)는하십니까?”, “선도는하지는 않지만 좋아합니다.”,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다 좋아한다니 그러면 무엇이오?”


  이 말을 듣고 수운은 두 팔을 내밀면서, “대사는 어느 팔을 배척하고 어느 팔을 사랑하오?” 그때야 노승은 웃음을 지으며 “네, 알았습니다. 선생은 몸 전체를 사랑한다는 말씀이군요.” 이어 수운이 말하기를 “나는 유도 아니요, 불도 아니요, 선도 아니요, 그 전체의 진리인 천도(天道)를 사랑할 뿐입니다. 천도는 없는 곳이 없으니 그 전체를 사랑 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러면 유교와 불교, 선교 중에 어느 가르침이 그 이치가 높습니까?”, “높고 낮고 크고 작은것은 없습니다. 죽은 사자와 죽은 개가 어느 것이 더 무섭습니까? 한번 죽고 나면 사자나 개나 마찬가지입니다. 진리 역시 그러합니다. 무슨 진리든지 그 시대 사람에게 생혼을 불어넣지 못하고 그 시대에 맞는 정신을 살릴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송장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예전의 묵은 것으로는 도저히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죽은 송장 속에서 새 혼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무극한 운을 꽉 붙들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야지요.”


  송월당과의 대화를 통해 수운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낡은 진리와 제도의 실체를 똑바로 응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1862년 5월경, 수운은 남원 은적암을 떠나 경주로 돌아온다. 단순히 날이 따뜻해지고 여행하기 좋은 절기가 돌아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사진 설명 : 남원 은적암 터 - 수운은 관의 탄압을 피해 1861년부터 1862년 사이 이곳 남원 교룡산성 내에 있는 덕밀암(德密庵)의 방 한 칸을 얻어 한 해 겨울을 보냈는데, 그 방의 이름을 ‘은적암(隱蹟庵)’이라고 불렀다. 수운은 그 방에서 <논학문> 등을 집필했고, 칼 노래를 부르며 칼춤을 추었다는 기록 등이 있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김개남 장군이 전투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잡목만 무성한 채 공터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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