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수와 함께 하는 우리문화 이야기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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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수와 함께 하는 우리문화 이야기 49
  • 한울안
  • 승인 2001.03.27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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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五峰山) 낙산사(洛山寺)


낙산사 의상대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고, 헌안왕 2년(858)에 범일(梵日)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6·25 때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스님인 익장(益莊)의 기문(記文)에 “양양 동북쪽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두어 마장쯤 되는 큰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1백자 가량이 되고 크기는 곡식 1만 섬을 싣는 배라도 용납할 만하다. 그 밑에는 바닷물이 항상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렁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가 머물던 곳이라 한다.
굴 앞에서 50보쯤 되는 바다 복판에 바위가 있고, 바위 위는 자리 한 닢을 펼 만 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 신라 의상대사가 친히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하여 바위 위에서 자리를 깔고 배례를 하였다. 27일이나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오히려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동해 용왕이 바위위로 붙들고 나왔다. 대성(大聖)이 곧 바다 속에서 팔을 내밀며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 두 그루의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꼭지 위다. 거기에다 불전을 짓고 상설(像設)을 안배(安排)하라’하였다. 용도 또한 여의주와 옥(玉)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써 불상을 만들어 봉안하였는바, 곧 이 절이다”하였다. 따라서 낙산사의 금당(金堂)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圓通寶殿)이고 낙산사를 관음도량이라 한다. 또한 그 굴을 관음굴이라 하고 홍련암이라 부르는 암자가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세조는 낙산사에 행차하여 사찰을 크게 중수하고 주위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때 만든 성문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강원도 고을 수에 맞추어 26개의 홍예석을 써서 조영(造營)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낙산사 원통보전 주위의 담장은 기와를 이용하여 쌓은 것으로 불에 구워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비바람에도 흙이 씻겨 내리지 않아 아주 튼튼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담장에는 동그란 돌로 심을 박아 보강을 하였는데, 이는 하늘의 별자리를 의미하는 상징성이 있어 이곳이 곧 극락세계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산 정상부에 높이 16 m 가 되는 거대한 해수관음상을 조성하여 특히 어부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처로 유명해지기도 하였다.
오봉산은 낙가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관음보살의 상주처인 인도의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에서 연유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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