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수 없는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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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수 없는 가르침
  • 한울안신문
  • 승인 2001.07.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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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과 고산 종사


봉산 이경식 교도"일산교당


죽은 부처 섬기지 마라

나는 대학 1학년 첫 겨울방학 때 원불교교전을 접하고 교법에 매혹되었다. 부처라면 절에 있는 황금빛 불상으로 알고, 고작해야 2천5백년 전 인도 나라에서 나신 석가모니로 알다가 깨달은 자는 다 부처임을 알고, 더 나아가 사람이 부처가 아니라 진리 자체가 부처임을 알자 의기양양했다. 법신불이란 말이 일원상과 함께 일상적으로 쓰이는 법회에 참예하기를 거듭하는 동안, 나는 전통불교에서 불상을 숭배하고 석가모니불에 매달리는 신앙 방식을 비판할 만큼 일원상 신앙에 눈을 떠가고 있었던가 싶다.
한번은 자하문 쪽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노승 한 분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어느 승강장쯤에선가 부인네 한 패가 버스에 올랐다. 그들은 아마 같은 교회 다니는 교우들이었는지 집사님 권사님 하면서 왁자지껄했다. 마침 노승을 보자 부인네들은 ‘너 잘 만났다’는 듯이 사뭇 경멸하는 투로 도전하였다.
“스님, 부처님이 높은가 하나님이 높은가 어디 말해 보세요.”
“부처님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신인데 누가 더 높겠어요?”
그들은 마치 스님의 대답에 따라 수틀리면 요절을 내겠다는 투로 압박을 가해 왔다. 나는 이런 막가파식 예수쟁이들에게 화가 치밀었다. 나는 스님이 탁월한 도력으로 일갈하여 오만방자한 그들을 꼼짝못하게 만들었으면 하고 스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눈을 지긋이 감고 있던 스님은 무례한 예수쟁이들과 얼치기 원불교 청년이 주시하는 가운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렴, 부처님보다 하나님이 높구 말구요.”
뜻밖의 대답에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예수쟁이들은 승리감에 도취한 듯 다시금 왁자하니 웃고 떠들며 좋아했다. 다시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아무 일도 없은 듯 묵묵한 노승을 보며 나는 화풀이처럼 돌을 던졌다.
“스님, 저도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
“불법의 진리는 석가모니불 출세 전에도 있었고 열반 후에도 여여한데 왜 불교에서는 삼보를 불·법·승의 순서로 하여 불(佛)을 법(法)의 앞에 둡니까?”
나는 속으로, ‘이 땡초 같은 늙은 중이 이런 고급 질문에 무슨 답변이나 하랴’하고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노승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무겁게 닫혔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사불을 섬기다보니 그렇게 됐소.”
“네? 사불이라뇨?”
잠깐도 생각해보지 않고 나는 즉각 경망스럽게 반문했지만, 스님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나는 그제서야 곰곰이 생각했다. 사불이라? 네 부처(四佛)도 아니고 모래부처(沙弗)도 아닐 테니 죽은 부처(死佛)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냈다.
석가모니불(佛)이 도를 얻은 후 중생 건질 법(法)을 설하셨고 그 후 그를 따르는 무리(僧)가 승단을 이룬 것이니 불법승의 순서가 굳이 트집거리는 못 되지만, 법신불 아닌 역사적 화신불에 집착하는 신앙 행태를 걸고넘어지려는 내 질문의 속셈을 간파한 스님이 우문현답을 주신 것이다.
법신불보다 석가모니불을 더 섬기는 불교도, 하느님보다 예수님을 더 믿는 기독교도, 일원(상)보다 대종사를 더 받드는 원불교도는 없어야 한다. 이것을 놓고 법신불과 석가모니불이 둘이 아니고, 하느님과 예수님이 둘이 아니고, 일원(상)과 대종사가 둘이 아니니까 굳이 그런 식으로 나누지 말라고 한다면 이는 문제의 본질을 심하게 왜곡하는 논리가 될 것이다.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20세에 내 발로 서울교당을 찾아가서 입교를 했을 때, 당시 고산 이운권 종사님은 서울출장소장으로 서울교당에서 주석하고 계시었다. 책상머리에 달마 인형을 놓고 계시며 때로는 글씨도 쓰시고 달마도도 그리시던 고산 님이 나는 그렇게도 대하기 편해서 자주 뵈러 갔었고 고산 님도 나를 꽤 예뻐해 주셨다.
그후 나는 직장(학교)을 잡아 옮겨다니느라 가까이 모실 기회가 없었지만, 고산 님도 교정원장으로 임명되어 서울교당을 떠나셨다. 그래도 가끔은 서신을 올리기도 하고 찾아뵐 기회도 없지 않았는데, 한번은 총부로 찾아갔더니 동산선원에 머무신다고 하여 그리로 찾아뵌 적이 있다.
“저는 요즘 직장에서 미운 사람이 있어 괴롭습니다. 괜히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하는 짓이 제가 보기엔 정말 잘못된 것인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 못 만나는 괴로움과 함께 미운 사람 만나는 괴로움이 중생의 여덟 가지 괴로움 가운데 들어 있지만, 싫은 사람과 같은 직장 다니면서 얼굴 마주하고 수시로 부딪치며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괴로운가? 그것도 아랫사람 같으면 좀 나으련만 무시할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윗사람의 경우는 고통이 배가된다.
“대종사님이 그러셨다. 일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마음 대중을 그 말씀에 두어라.”
그 말씀이 당시엔 별로 신통하게 들리지 않았다. 무릎이라도 탁 칠 무슨 뾰족한 방법을 한 수 가르쳐 주었으면 했는데 고작 그 소린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속담을 둘러친 것이지, 뭐 별스런 얘기도 아니잖나. 누가 미워하자고 맘먹고 미워하나, 미운 짓을 하니까 미워하지. 나는 시큰둥한 기분으로 물러나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먹으면서 경계를 대할 때마다 고산 종사님의 그 가르침이 상기된다. 그 사람이 저지른 불의, 부정, 비리 그리고 내게 대한 해코지 등 그 일(악업)은 미워할지언정 그 사람 자체는 미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내게 먹혀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사람의 성품자리는 평등하고 그 자리는 시비선악이 없는데 무엇을 미워할 것인가. 마음바탕은 부처이나 경계 따라 탐·진·치가 발하고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면 그 일로 사람까지 미워할 이유는 도무지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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