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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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학교
  • 한울안신문
  • 승인 2001.10.26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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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화 포럼 " 종로교당 10월 18일


박성준교수"움직이는 학교 교장


교리 없는 퀘이커
반갑습니다. 이렇게 서서 강연하는 것보다는 같이 빙 둘러서 원을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움직이는 학교도 원을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는데 원불교와도 제가 인연이 있는 듯 합니다. 이렇게 둥그렇게 앉는 이유는 한사람 한사람을 상석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학교에서는 10명에서 15명을 넘지 않도록 하여 작은 모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이렇게 둥그렇게 앉을 수 있으니까요. 둥그렇게 앉으면 제일 상석이 없습니다. 각자 앉은 곳이 상석이지요. 제가 불교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불교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한사람 한사람이 존귀한 존재라고 하니까요.
퀘이커 신자도 각 사람 속에 빛이 있다고 합니다. 퀘이커 신자들은 교리가 따로 없습니다. 교리가 없다는 것이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교리를 갖지 않는 이유는 현재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은 진실의 작은 부분이라는 반성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진실의 소리를 배우기 위한 겁니다. 퀘이커 신자들은 ‘우리는 단지 진리를 향해서 항해하는 여행자이자, 일손이다’라고 합니다. 나그네라고도 하지요. 불교적인 생각과 닮지 않았나요. 마치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처럼.

퀘이커의 탄생
퀘이커는 17세기 영국에서 시작하여 기독교의 한 가지로 열려있는 마음과 진리를 지향합니다. 다르다해서 배척하고 내가 옳다해서 남을 지배하려하지 않는 정신에서 시작합니다. 과학과 휴머니즘, 다른 종교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빛을 보려합니다. 또한 진실을 발견하면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퀘이커들이 발전하면서 불교쪽으로 관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에 빛이 있음을 본 것이지요. 퀘이커는 크게 나누어 기독교 퀘이커와 불교 퀘이커로 나누어 집니다. 미국에 퀘이커 인구가 20만명 남짓하는데 역사도 3세기가 넘었습니다. 퀘이커는 빛나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영국에서 한참 아래로부터 혁명이 일어 민주주의 정신이 싹을 틔울 때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뭐가 진실인가?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찾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시커(Seeker)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퀘이커(Quaker)들이 탄생했습니다. 국교가 탄압하고 다른 개신교가 퀘이커을 박해하여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습니다. 퀘이커들이 투옥된 이유는 당시 계급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퀘이커들은 각 사람에게 빛과 본질이 같고 각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신념으로 상석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구타를 당하고 투옥된 수만 4000여명이 넘었습니다. 어떤 권위 앞에서도 자신의 진리를 말해 그 당시 판사들 중에도 감동을 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법정에서 진실을 말할 때 퀘이커들이 몸을 떨면서 이야기를 해서 지진(Earthquake)의 약자로 퀘이커(Quaker)라 불리웠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몸을 떠는 사람이라는 멸시의 뜻으로 불렀는데 퀘이커들은 그것을 애칭으로 받아들인거죠.
제가 미국의 펜들 힐이라는 명상센터에 있었는데 세계각지 사람들이 와서 배웁니다. 직장인들이 시간을 내어 일주일에 한번, 한달에 한번씩 멀리서 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곳에는 큰 나무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나무가 사람을 끌어 드립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를 하고 나무에게 절을 합니다. 사람들이 침묵의 예배시간에 그 나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나무 앞에 가면 고개가 숙여진답니다. 나무에게도 빛이 있음을 본 것이지요. 예배는 30분동안 모여 앉아서 하는데 누가 말하지 않아도 각자 침묵의 깊이가 쌓여가는 고요를 느끼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시간에는 어떤 침묵의 밀도가 느껴지는 시간이지요. 그리고는 마음 속에 말씀이 들려오면 그 말씀을 반추 반추해서 무르익으면 말을 합니다. 이 분들은 언어를 절약하기 위해 시적으로 표현하고 감동적으로 말합니다. 퀘이커들은 공책을 한 권씩 들고 다니는데 예배 중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하고 일상 속에서의 느낌도 기록을 합니다. 이들은 그것을 여행자의 기록이라고 하는데 300여년동안 쌓인 기록이 도서관에 꽉 들어찰 정도이며 주옥같은 작품들은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퀘이커들은 개종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배워야지 상대를 전복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떠나올 때까지 그 분들이 퀘이커가 되라고 한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퀘이커가 되는 거지요. 그들은 철저히 멤버쉽으로 이루어지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을 하는데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미국친우봉사회’라는 NGO조직은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 곳은 20%는 퀘이커이고 80%는 일반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경력이 있습니다. 이런 퀘이커를 경험하고 작년 3월12일날 멤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경청(敬聽)하는 학교
저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안에서 극단적인 상상을 하나 했습니다. 한국인을 생각할 때 입은 대형 스피커같고 귀에는 귀바퀴가 없는 사람이 생각나더군요. 저는 그 상상을 하면서 하나의 운동을 구상했습니다. 바로 ‘경청(敬聽)’하는 운동입니다. 경청은 나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열어 놓고 사람에게, 자연에게, 천지신명에게 고요히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비판하고 따지고 주장하는 ‘말하기’에 못지 않게, 겸허히 마음을 비운 ‘듣기’가 필요한거지요. 말하는 ‘입’과 듣는 ‘귀’의 균형이 요구됩니다. 경청은 사람에게 변화를 강요하기보다는 변화의 씨앗을 그 마음에 가만히 뿌려놓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운동을 할 시기에는 날카로운 의식은 있었으나 따뜻함은 없었습니다. 메스를 가하여 분석할 줄만 알지 치유할 힘은 없었던 겁니다. 나에 문제가 치유되고 우리 사회가 치유되는 해결점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민운동단체들에게 ‘경청’에 대한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경청’을 통해 운동이 살아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생각과 구상으로 ‘움직이는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움직이는 학교는 학생이 학교를 찾아다니 것이 아니라 학교가 학생을 찾아다닙니다. 움직인다는 뜻이죠. 고인 물이 되면 썩어버립니다. 일정한 틀을 만들면 굳어 버립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깨야 성장하듯이 움직이는 학교는 진실을 찾아 다닙니다. 노동자분들을 만나고 시민단체들을 만나러 다닙니다. 최근에 경찰서에 가서 강의를 했는데 ‘수업 준비 끝’이라면서 시작하더군요. 재미있었습니다. 녹색연합에서 강의 할 때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재미있는 게임을 소개 시켜 주셔서 같이 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학교는 움직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풍부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움직이는 학교는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꿈틀꿈틀하는 영(靈)을 주고 받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주로 한국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듣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학교에서는 모이면 빙 둘러 앉아서 서로가 쌍을 지어서 5분동안 듣는 시간을 갖습니다. 귀가 온 존재가 되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거죠. 그리고 1분씩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누가 먼저 이야기를 하는가는 각자의 자발성에 맡깁니다. 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까지 자기가 이야기하는 차례를 뒤로 미루어도 좋습니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겸허한 자세로 진지하게 귀를 기울입니다. 처음에는 수줍어하거나 주저했던 사람도 이야기를 경청해 주는 사람들의 진지함에 이끌리어 점차 무르익는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이야기 꾸러미를 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1분씩 이야기를 하고 나면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의 이야기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참여연대에서 함께 일하시는 친구분들이 이 시간을 갖고 “30여년동안 가까이 사귀어 보면서 네가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더군요. 움직이는 학교는 마음을 열게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하여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경청을 통해 개인의 자주성을 확립하게 됩니다. 빙 둘러앉아 자신이 각각 상석이 되어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체험을 하게 되는 거지요. 저는 움직이는 학교를 통해 자주성이 바로 서면 공동체가 얼마만큼 대단한 능력을 갖게 될 것인가?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감동의 떨림이 전해져옵니다.
〈이후 원문화 포럼 참석자를 대상으로 경청 시간을 가졌다〉

<정리: 전재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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