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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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발견
  • 전재만
  • 승인 2002.05.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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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 이경식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 눈에 따라 인생의 의미와 모습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치 검은색 안경을 쓰면 세상이 온통 검게 보이고 붉은색 안경을 쓰면 세상이 온통 붉게 보이듯이 말입니다.3천년 전 인도 석가모니의 눈에는 세상이 모두 고통으로 비쳤습니다. 생로병사 생애가 다 고(苦)라고 했고, 세상은 고해(苦海)요, 중생은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이고득락(離苦得樂)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2천년 전 유대 나라 예수의 눈에는 세상이 모두 죄악으로 비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죄인이니, 인류의 원조라는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죄로부터 모든 인간은 원죄(原罪)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날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구원받으라고 외치는 것입니다.86년 전 조선 사람 소태산의 눈에는 세상이 온통 은혜였습니다. 일제 식민지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가장 가난한 두메, 그나마도 제일 저주스런 처지에 있던 소태산이 깨닫고 보니 모두가 은혜라니 이 웬일입니까. 자연(천지)도 은혜, 문화(법률)도 은혜, 상하로 봐도 은혜(부모), 좌우로 봐도 은혜(동포), 도무지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따뜻한 것이 은혜인 줄은 알면서 추운 것이 은혜인 줄은 모릅니다. 칭찬이 은혜인 줄은 알면서 질책이 은혜인 줄은 모릅니다. 단 것이 은혜인 줄은 알면서 쓴 것이 은혜인 줄은 모릅니다. 부유한 것이 은혜인 줄은 알면서 가난이 은혜인 줄은 모릅니다. 낳는 것이 은혜인 줄은 알면서 죽는 것이 은혜인 줄은 모릅니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깨달으신 바 은혜는 상대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처 은혜인 줄 모르는 것, 은혜는 커녕 해독이요 불운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서조차 은혜를 찾아내어 감사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찾아내고 알아낸 것이니 곧 ‘은혜의 발견’입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고,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도 있습니다만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장마비가 짚신장수에겐 저주이고 우산장수에겐 축복이란 차원도 아닙니다. 가치중립적인 회의주의 세계관은 더더욱 아닙니다. 대종사의 눈은 생명의 근원, 우주만물의 본질적 관계를 은혜로 직시한 것입니다.그러나 배은자의 장난으로 인한 현실적인 해악을 외면하거나 호도하는 것이 은혜의 시각일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의지와 힘을 바탕하여 능동적으로 은혜를 일구어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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