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들지 않는 봉공, 여전한 청춘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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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지 않는 봉공, 여전한 청춘의 비결'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12.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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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들어 준 신앙 ... 일산교당 김성천 교도



“형님, 내가 비울텐 데 왜 힘들게 먼저 비우셨소.”


교당 쓰레기통을 형님이 먼저 비웠다며, 김성천 교도가 멀리서부터 손사래를 친다. “내가 막내야 막내. 그리고 궂은일 내가 하면 편하잖아.” 칠순이 훌쩍 넘은 나이, 하지만 나이에 대한 상 같은 건 진작에 버린 지 오래라는 그녀. 기어이 통을 받아 들고는 “더구나 교당일에 나이가 어딨어요”한다.



# 아프단 소리 한번 안하고


“보은미 상 몰라요? 봉공 잘했다고 그 상도 많이 받고 그랬는데.”


이제 이름도 희미해진 보은미 상만큼이나 봉공역사 오래된 김 교도. 농사철이면 교당 일꾼들 밥도 해주고, 자갈 천지였던 영모묘원에서 터도 닦았으니 그게 벌써 40여년 일. 교당일이라면 저녁밥 짓는 것도 잊고 농두렁을 달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성가부르며 닦던 영모 묘원은 철따라 꽃피는 아름다운 곳 되었고, 엄마였던 그녀는 할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지요.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봉공자세요.”


그 마음가짐은 서울로 올라와 교당을 옮기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교당 불사를 위해 고생하는 교무님이 남 같지 않아, 다시 두 팔을 걷어붙이고 미역에 깨강정을 만들어 판 것. 아직도, 교구 바자회 때면 남은 물건을 머리에 이고 야무지게 장사하던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 그때가 이미 60대 때였다.


“젊은 사람한테 피해가 될까봐 아프다, 피곤하다,란 소리 한번 안 했지요. 나이들었으니 쉬시라 그럴까봐 내 일보다 더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 교당 김부각을 만들며 법동지들과 함께 할 때면 봉공한다는 상보다는 ‘인생의 즐거움’이란 기쁨이 더 크다는 김 교도. 그것이 바로 ‘내가’ 부처님에게 바 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이라 생각한다.


“글쎄요. 이좋은 법을 공으로 배우면 안 되잖아요. 모나던 날 둥글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더 어여삐 만들어 주시는데 육신이 끝날 때까지 봉공으로 갚아야지요.”



# 인기인의 비결?


“내가 가는 곳마다 웃겨요. 그래서 어딜 가나 ‘이제 왔냐, 여기 앉아라’ 하지요.”


교당에서든 문화센터에서든 누구나 반기는 인기녀, 인기할머니 되시겠다. 비결? ‘인사 한번 할 것 두 번하고, 미소 지을 것 함박웃음 짓는 것’. 거기다 항상 빈 마음으로, 안 좋은 말도 꽃으로 보고 들으니 자연스레 어디서든 반기는 사람 되어 있었다.


“그것이 인연 짓는 것이더라고요. 내가 그 사람한테 좋은 사람이 되면, 내가 믿는 신앙도 옳고 좋은 종교가 되는 거잖아요.”


또 그것이 바로 우리공부. 바로 그, 빈 마음으로 바라보기가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해심이 많아졌다’며 시댁식구들이 따라 입교했고, 많은 인연들이 생겼고, 지금의 화사하고 고운 ‘나’를 만들어주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는다,란 생각으로 꾸준히 기도하고 좌선했어요. 듣고, 보고 실천하려 노력했고요. 지금도 점점 나아지는 날 느끼는 걸요.”


비로소 ‘내 마음이 부처’란 걸 깨달았다는 김 교도. “내가 이 종교 안 만났다면 흩어졌을지도 몰라. 아마 그랬을 꺼에요.” ‘내가 옳은 길을 택한 것’같아 기쁘고 또 기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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