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공, 내20년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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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공, 내20년의 얼굴'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7.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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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전한 현역 ... 가락교당 김정배 교도



“봉공회 덕에 운전 실력이 늘었다고 우스갯소리 하기도 했지요.”


그도 그럴 것이, 초보운전 딱지를 붙이자마자 여름이면 수해현장으로 가을이면 훈련으로, 거기다 그 시절 초보에게는 난코스 중 난코스였던 가락시장을 내 집 드나들 듯 했으니, ‘운전실력의 반할은 봉공회가 키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도 한 셈. 신심 푸르렀던 40대, 봉공을 위해 초보운전일 새가 없었던 때였다.



# 봉공 덕에, 초보일새 없어


“그때가 교당 신축할 때여서 한 푼이라도 아껴보겠다고 매주 새벽시장에 가서 푸성귀를 얻어 왔어요. 공익을 위하는 일인데 뭐가 창피하냐 싶었지요.”


교당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고 하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밖에서는 사모님이라 불렸지만, 교당에서는 교도들의 운전기사에 몸빼 두려워 하지 않는 봉공회의 똑순이였고 봉사현장에서는 남들이 꺼리는 화장실청소부터 시작하는 몸 아끼지 않는 봉공인이었다.


“내가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공익은 남을 위한 일만이 아닌,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 생각은 봉공으로 20년을 보낸 지금도 마찬가지, 교당의 어르신으로 대접 받을 나이 임에도 그는 여전히 서울역 무료급식, 종로복지관, 중앙대병원 등 봉사를 놓지 않는 현역. 거기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봉사활동을 위해 교도들의 호스피스, 다도 등의 교육을 이끄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푸르른 청춘이다.


“준비가 되어 있으면 체계적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잖아요. 우리 만족을 위해서만 하는 봉공이 아니니까요.”


어디서든 환영받는 분홍조끼, 일당백이라 불리는 가락교당의 봉공회, 봉공으로 푸른 청춘을 보낸 김 교도 20년의 얼굴이기도 하다.



# 대를 이은 일원가족


그러다보니 김 교도의 일주일은 봉사로도 하루가 모자랄 정도, 거기다 매일 교당에서 드리는 백년성업기도와 수요공부방, 다도회 까지 합치면 ‘일정이 꼬이지 않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필요할 정도다.


“그냥 받기만 할 수 없잖아요. 저는 신앙생활로 얻은 게 많아요. 남편도 교당에서 만났고요, 아이들도 원불교 울타리 안에서 바르게 자랐지요.”


적극적인 청년회장이었던 남편과 교당을 집처럼 드나들었던 아이들. 두 아이는 아버지 뒤를 이어 학생, 청년회장을 맡았고, 또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청년회에서 만나 결혼해, ‘3대가 일원가족’이라는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시댁, 친정, 사돈까지 원불교 가족이니까요. 그것만큼 큰 은혜가 어디 있겠어요. 모이면 바자회 준비 얘기, 공부 얘기, 훈련에서 좋았던 얘기들을 하지요. 잡음 한번 들린 적 없으니, 화목의 비결이지요.”


어떤 말보다 ‘일원가족으로 예쁘게 살아서 고맙다’는 스승님, ‘일원가족 특별상이라도 주고 싶다’는 교도들의 말이 값질 수밖에 없는 이유, 또 한번도 힘든 적 없었던 봉공 힘의 동력이다.


“서원요? 건강이 될 때까지 공부하고 봉사하는거, 지금처럼요. 그럴수 있다면 참 좋겠어요.”



김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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