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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울안신문
  • 승인 2001.06.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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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교무"6월10일 공항교당


서영수 교무"공항교당


철 든 사람
「대종사 젊은 남녀 가운데 혹 공부의 바른 길을 잡지 못하여 헤매는 사람을 걱정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들 가운데 처음에는 잘 하다가 나중에는 잘못 하는 사람도 있고 처음에는 잘못 하다가 나중에는 잘 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내가 미리 짐작하여 각각 적당하게 지도하나, 나이가 삼십이 넘으면 그 사람의 일생 인품이 대개 틀 잡히는 때라, 만일 그 때까지 철이 들지 못하는 사람은 실상 나도 근심이 되지마는 자신들도 큰 걱정이 될 일이니라.”」(인도품 31장) 대종사님께서는 철들지 못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걱정해주셨습니다.
교도님들, 스스로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정에서는 가정에 맞는 철이 들어야 하고, 사회에서는 사회에 맞는 철이 들어야 하듯, 공가(公家)에서도 도(道)에 맞아야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들지 못한 모습
우리가 흔히 ‘철들지 못했다’고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첫째, 대·소변 못 가리는 사람을 보고 철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둘째, 코흘리고 침흘리는 사람을 보고 철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셋째, 말을 못 가리는 사람을 보고 철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말을 못 가린다는 것은 세상 물정을 모르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넷째, 눈 못 가리는 사람도 철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은 뜨고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도록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봐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서 보아야 합니다. 봐도 되는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 가리는 것입니다. 다섯째, 귀 못 가리는 사람도 철들지 못한 사람입니다. 들어야 할 것, 듣지 말아야 할 것 역시 구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섯째, 마음 못 가리는 사람입니다.

철든 사람의 마음 대중 잡는 법
가정에서는 가장으로, 어머니로 그 역할을 다하시고, 직장에서도 맡은 바 직위에 따라 철 든 사람일지는 모르나, 도가(道家)에서 철이 든 사람인지 아닌지는 각자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공부 하는데 있어서 철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무엇으로 구분해 볼 것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문(道門)에 있어 정(正)과 사(邪)를 구분할 줄 알아야 되고 공가(公家)에 있어서는 공(公)과 사(私)를 구분할 줄 알아야 비로소 철이 든 사람입니다.
대종사님 당대에 권동화라는 선진님께서 저축조합에서 돈을 빌리셨습니다. 그러자 대종사님께서는 “총부 간부들이 총부 재산을 빌어 썼다고 하면, 일정의 감시가 심한 이 때 여간 곤란하지 않다”시며, 권동화 선진님의 복숭아밭을 담보로 설정하라고 종용하셨습니다. 그러자 권동화 선진님은 1개월간 기간을 주실 것을 사정하고, 그 기간 내에 빚을 청산하였습니다. 전무출신은 교중의 재산을 ‘내 것’처럼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대종사님께서는 “네 비록 공사(公事)를 하는 사람이나, 교중의 돈을 쓸 때에는 공적인 책임을 지어야 한다”시며, 공가에서 더욱 공중사를 철저히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빙공영사·선공후사·지공무사
공사(公私)를 구분하는 데 표준 잡아야 할 것은 첫째, 빙공영사(憑公榮私)로 나의 본의(本意)를 잃은 생활인가 둘째, 선공후사(先公後私)로 대의를 잡은 생활인가 셋째, 지공무사(至公無私)로 순전히 공을 위한 생활인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빙공영사를 하려는가 안 하려는가, 즉 공중 일(公衆事)을 하며 그것으로 인해 내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려하는지 대조해봅시다. 또 공(公)을 우선하고 대중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대의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극히 공을 위하는지 아니면 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지의 여부로 공사를 구분하는 표준을 삼아야 합니다.
공(公)을 존중하는 것이 곧 자기를 존중하는 것이 되고 공(公)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곧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 되는 원리와 공도 사업은 곧 보은의 근본적 의무임을 철저히 깨쳐 알아 행해야 합니다.

도가에서 철 들려면
도가(道家)에서 철이 들려면 정과 사(正邪)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몸소 실천해 보고 행하도록 하는 것은 정도(正道)요, 실천없이 행한 것은 사도(邪道)입니다. 성품이 바르게 발하면 정(正)이 되고, 굽어져 발하면 사(邪)가 됩니다. 고려시대 스님인 묘청은 ‘고려의 미래를 생각할 때, 남진보다는 북진이 국운을 뻗치는데 유리하겠다’싶어 평양 천도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개성 유지들의 반대가 심해지자 순리대로 해서는 천도가 어려워지리라 생각한 묘청은 인종 10년, 왕이 서경에 행차하는 기회를 이용해 비밀리에 커다란 떡을 만들고 그 속에 기름을 넣어 대동강 물 속에 넣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떡의 기름이 물 위로 떠올라 영롱한 빛을 발했습니다. 묘청의 무리들은 왕에게 상소를 올려 중국의 천자(天子)처럼 고려의 왕도 제왕(帝王)이라는 칭호를 쓰고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자신의 연호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평양에 서기(瑞氣)가 피어오르고 있으니 평양으로 천도하고 금(金)나라로 쳐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동기가 아무리 옳았다고 하더라도 진실하지 못했다는 점은 묘청의 실수였습니다. 햇빛을 받아 오색 영롱하게 빛나던 것이 묘청이 뿌린 기름이었다는 것이 탄로가 나자 묘청은 왕의 신임을 잃고 평양천도의 뜻은 좌절되었습니다. 혼자 북진의 뜻을 이루고자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에는 반군으로 몰락하였습니다.
진실보다 더 큰 무기는 없습니다. 설령 자신의 뜻을 이루는 일에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묘청은 좀 더 인내와 성실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추진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망쳤고 나아가 국가적 불행을 끼쳤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했습니다. 모든 일은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결국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지요.

나는 정사·공사를 구분하는가
이 자리를 빌어 ‘나는 정사(正邪)를 구분하는가 못 하는가, 공사(公私)를 구분하는가 못하는가’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또 왜 내가 정사(正邪)를 구분해야 하며, 공사(公私)를 구분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봅시다. 바른 길(正道)을 가는 사람은 주변에 덕화(德化)를 미치고, 주변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해 줄 수 있습니다. 반면 그른 길(邪道)로 가는 사람은 혹세 무민하게 됩니다.
공(公)을 위해 일하는 사람, 항상 선공후사 하는 사람은 대중의 이익을 우선하기에 개인의 사욕이 없습니다. 반면, 사(私)된 이익을 키우는 사람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합니다. 공을 빙자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이지요. 철들지 못하면 순간은 넘길 수 있을지언정 먼 미래의 성공은 이룰 수 없습니다.
한 제자 정산종사님께 “정미소를 운영하려 합니다”하자 정산종사님께서는 “네가 전무출신을 하며 신용을 많이 얻었다. 너희 집사람이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것은 네 신용에 바탕해서 운영하는 것이다. 공을 업고 사가 일을 돌보는 것이니 처음에는 잘 될 것이나 멀리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돈을 벌거든 그 이익의 반은 공중사에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도 이래야 합니다. 공(公)을 우선하고 사(私)를 나중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공과 사가 모두 흥하게 되나 사를 먼저 챙기는 사람은 그 성공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나는 공·사(公私), 정·사(正邪)를 구분하는가’ 항상 반조하셔서 바른 길로 마음의 표준을 잡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리: 이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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