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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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의 유산
  • 전재만
  • 승인 2001.11.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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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규철"두밀리 자연학교장


10원짜리 사나이
저를 잘 모르시는 분들 있으면 손 들어 보세요. 흔들어 보세요.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10원짜리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다방의 마담이나 식당의 종업원은 눈치가 빠릅니다. 제가 다방에 가면 마담이 10원짜리를 주면서 얼른 가라고 합니다. 손님들에게 방해가 된 답니다. 제가 10원을 받고 커피를 마신 후 500원을 내니 이래봬도 490원짜리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끔은 5원짜리를 주는 사람도 있어요. 대천에서 화장실에 갔는데 유료화장실 요금이 5원이더군요. 10원짜릴 주었더니 먹고 살기도 어려우니 그냥 가래요. 이런 경우를 하루에도 몇번씩 받습니다.
제가 10원짜리는 아닙니다. 이렇게 보여도 돈 많이 들인 얼굴입니다. 자동차 사고로 2년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성형수술만 30번을 받아 새로 만든겁니다. 요즘 돈으로 하면 천만원 이상 갈 겁니다.
34년전에 사고가 났는데, TV를 보면 우주 조종사 스티븐 호스킹 아시죠? 그 사람이 600만불의 사나이입니다. 제가 600백만불의 사나이는 안 되도 600만원의 사나이는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회적인 풍토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격이 있느냐? 사회적으로 얼마나 봉사를 하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 권력, 자가용으로 한 사람의 인격과 가치를 속단, 평가합니다.
수학을 배우셨을 겁니다. 좌표 중에 싸인 곡선과 코사인 곡선이 있습니다. 보통 의지력이나 보통 정신으로 살 수도 있지만 +에서 -사이로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커다란 불행과 역경을 당했을 때는 보통 의지력으로는 안됩니다. 강한 의지력과 정신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적극적인 정신자세라고 합니다. 반대는 부정적인 정신자세가 있습니다. 일생을 살다보면 중요한 순간에 한 사람의 운명이 바뀝니다. 10년 전에 박장수라는 사람이 인천공장에서 일을 하다 화상을 입었어요. 너무 심해 문둥이로 오해 받습니다. 그 사람이 호텔에 갔는데 호텔 커피숍에서 종업원이 밀어내더랍니다. 그래서 ‘니들도 구워져봐라’하면서 호텔에 불을 질렀습니다. 긍정적으로 가느냐 부정적으로 가느냐 두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5년전 대전 교도소에서 갔는데 거기에 그분이 있데요. 무기징역을 받았답니다. 그 친구에게 책을 선물했습니다. 그분이 만 5년동안 편지를 보냅니다. “8년동안 부정적으로 살았는데 책을 읽고 나니 긍정적인 희망을 가지고 살아 보렵니다”하고 편지를 쓰셨어요.

화염속에서
제가 얼마짜리 인생이라고 했습니까? 10원짜리라고 했죠. 그런데 10원짜리만은 아닙니다. 제가 과거가 좀 있습니다. 제 고향은 이북 함흥인데 서울에서 대광고등학교 서울대 농대를 나오고 덴마크로 가서 유학을 하고 1967년 31살의 나이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부산에 있는 친구가 양계장을 하는데 그곳을 견학하고 돌아오다 차가 전복되었습니다. 차에 있던 ‘신나’ 두개가 터졌어요. 신나가 까스로 변해 순간적으로 폭발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탔어요. 차 밖으로 나가려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생각이 들었어요. 첫째 내가 죽으면 마누라랑 자식들은 어떻게 사느냐라는 생각, 둘째 내가 죽으면 천당이 있을까하는 생각, 세번째로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하며 뛰쳐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오고 나니 차 속에서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끄집어 내고 나서 저도 ‘사람 살려!’하고 소리쳤습니다. 농부들이 가마떼기를 들고 입고 있던 옷을 싸서 불을 껐습니다. 그때만해도 의식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두어시간 더 살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 순간 제가 하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부산에서 한 일이 있는데 적십자 의료보험이 제일 먼저 생각나더라구요. 또 간질환자를 돕는 장미회가 생각났습니다. 부산 송도 보훈 병원의 원장님인 장길훈 박사가 생각나더군요. 이분에게 유언도 하고 그러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길훈 박사는 유명한 분으로 5년전 돌아가셨어요. 그때 방송에서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했죠. 그 분이 6.25사변 때 보훈병원을 하면서 가난한 환자들을 도운 분입니다. 환자들이 시골서 왔는데 돈이 없으니 퇴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부장들이 회의를 했는데 무료가 안된답니다. 그래서 그분이 자신의 봉급을 가불받아 치료비를 주기도 하고 나중에는 환자들을 밤에 보따리 싸서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돈 없어 퇴원 못하는 환자들을 도망 보내는 의사였습니다.
‘장박사를 빨리 만나야 돼’ 그분에게 유언을 해야겠다 다짐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고등학교 때 읽은 책 생각이 나더군요. ‘사람은 그 사명을 다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 이 말이 계시처럼 들리고 안정이 되더군요. 보훈병원에 갔는데 의사 간호사들이 응급처치할 생각을 못해요. ‘잘못하면 병원 문턱에서 죽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곳에서 근무하는 사람을 불렀더니 “나 채선생님이다 원장님 불러 다오”하니 장박사님이 오셔서 “어떻게 된거냐?”는 말에 저는 “선생님 몇시간 더 살지 모르겠습니다. 의료보험, 장미회만은 끝까지 성공시켜 주십시오” 하니 그때부터 응급처치를 하는데 6시간을 했습니다.
제가 3도 전신 50%화상을 입었는데 3도 30%만해도 위험한 것에 비하면 기적같이 살아났습니다. 화상에는 세균감염, 탈수 현상, 자신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일주일이 지나니 장박사가 영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서 큰 병원의 의사를 불렀습니다. 부산에서 온 분이 ‘살릴 줄 모르겠다. 치료할 도리가 없다. 가망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목숨만이라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했더니 한가지 방법은 팔, 다리 절단하여 목숨을 살릴 수 있답니다. 장박사가 싫다고 하더군요. “팔, 다리 다 짤라 놓으면 인간구실을 하겠느냐?”하시며 “사람 목숨은 하느님 손에 달려 있으니 최선을 다해 보자”고 하시더군요. 장박사님이 손수 24시간 동안 화상치료를 했습니다. 간호대학 학생들도 도왔습니다. 그렇게 3개월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걸어다니는 걸작품
미군 친구가 있어 미군병원에 입원시켜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한국에 없는 화상약이 많았습니다. 미군병원 의사가 “아직도 살아있느냐?”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죽었을 거라며 기적이랍니다. 나같은 환자는 처음 보았답니다. 피부이식을 하면 보름동안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80% 성공하면 대성공인데 아무데나 붙이기만 하면 90%가 성공이었습니다. 그 친구 재미가 붙었는지 시간만 나면 붙입니다. 미군병원에서도 3개월만에 나왔습니다.
그 다음부터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강원도 원주에 가면 기독교 병원이 있는데 닥터 로스라는 분이 성형수술을 담당했습니다. 그분이 얼굴, 손을 다 해 줬습니다. 닥터 로스가 이제부터 얼굴 수술하기 전에 옛날 사진중에 잘 된 사진을 가져달랍니다. 제가 이래뵈도 미남이였습니다. 비슷하게 만든다는 것이 이렇게 만들어 놨어요.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줄 몰라요. 의사들이 예술가요, 성형이 예술입니다.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제가 문화방송에 ‘절망은 없다’프로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아나운서가 당선 소감을 묻길래 “많은 사람들이 문둥이로 밖에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러나 저는 걸어다니는 걸작품입니다” 아나운서가 나보고 웃기는 사람이라고 해요. 이렇게 살아서 움직이는 작품, 나만큼 화상입고 이만큼 된 사람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위대한 걸작품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알아주는 사람은 없어요.
동정하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자네는 여기 저기서 소외 받는데 불평이 많겠다” 고 그래요. 그러나 전 그 친구들에게 “불편한 적은 있어도 불평한 적은 없다”고 말합니다. 머리카락도 기적처럼 생겼습니다. 장발족 단속 때 순경에게 귀가 없으니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귀가 다 탔어요.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리 추운날에도 귀가 없으니 시린 법이 없습니다. 안경은 30년동안 쓰니 안경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런데로 자기 마음 먹은데로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이만 하면 다 살게 된 것이죠.
눈썹도 만들었습니다. 이건 머리카락을 따다가 이식을 한겁니다. 매일 자랍니다. 보름에 한번씩 눈썹 이발도 합니다. 눈썹에도 새치가 나옵니다.
나로서는 입도 마찬가지입니다. 티스푼 입술만큼 작아졌었는데 새로 만든 것입니다. 없어서 못 먹지 제 구실을 다 합니다. 또한, 손을 쓸 수 있습니다. 상상을 해봐요. 내가 부정적인 정신으로 살면 신경질이나 내고 친구들 만날때 열등감이나 갖고 우울증에 빠져 있다면 이만큼 못 살겁니다. 저는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걸어다니는 것만도 감사합니다. 그러니 인생과 운명이 달라집니다. 그 사람의 정신자세에 달려있습니다.

멋있는 인생이야기
우리는 언제가는 떠납니다. ‘일찍이냐, 나중이냐’하는 문제지만 떠날 때는 마찬가지입니다. 순서가 따로 없습니다. 대통령도 가고 거지도 갑니다. 후세 자식들에게 발자취를 남겨줄 필요가 있습니다. 더러 돈을 남겨놓고 가는 사람도 있고 책을 남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유산은 되지 못합니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이나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위대한 유산은 무엇일까요? 하나의 인생 이야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어떠한 이야기가 가장 위대한 이야기일까요? 고난과 역경을 신념과 신앙으로 이기고 내 인생을 보람있게 멋지게 아름답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후손들에게 남겨줄 가장 위대한 유산입니다. 아들이 제 아빠가 쓴 책을 읽으니 아빠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자신이 못하면 손가락질 받을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했답니다. 어떠한 정신자세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상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저절로 되는 겁니다. 진짜 마지막 이야기로 여러분이 인생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라는 겁니다. 신앙을 가지고 멋있는 인생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후세에 사회와 국가를 위해 여러분의 인생 이야기를 남기고 가기를 바랍니다.
<정리: 전재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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