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신앙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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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신앙의 자세
  • 전재만
  • 승인 2002.02.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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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민 교무


세계의 흐름
세계가 하나의 틀로 짜여지고 있다. 그 틀은 무차별적인 자본주의 논리에 영향을 받고 있다. 세계화의 물결은 거역할 수 없는 대세이다.
문화는 갇힌 곳에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곳에서 발전한다. 세계 문명이 성장하는 곳은 자기 문화를 독자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고립된 지역이 아니라 문화가 흐르고 교차하는 지점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문명에 갇혀 있는 곳에서는 세계적 종교가 탄생하지 않는다. 다른 문명과 교차하며 갈등과 번민을 하던 곳에서 보다 보편적인 대안으로써 세계적 종교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는 일방적인 서구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방법론적인 서구화’와 ‘내용적인 고유화’의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1. 세계의 종교 상황
서구는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종교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감소하였다. 여기에 불교 문명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지만, 아직 불교 문명은 서구 문명의 대안으로 등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시장에서 유명 상표가 판을 치고, 학계나 전문 영역에서도 서구의 유행이 주류를 이루듯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우리 나라처럼 외국 문명에 대한 민감도(세계의 사회들 가운데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외래 문명을 그 발상지보다 더 열정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우리나라일 것이다. 도교, 불교, 유교, 기독교가 차례로 들어오면서 그 열풍은 비교할 수 있는 나라가 없을 정도이다)가 높은 나라에서는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세계화의 물결은 반대 움직임을 자극한다. 그래서 종교에서도 세계화·보편화·세속화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순수 이념을 고집하려는 운동이 일어난다. 이것이 근본주의이다. 20세기 들어서 보편화된 세속화(우리 용어로는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의 물결에 위협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세속화에 저항하며 근본 교회·교리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거세게 일으킨다. 기독교는 미국을 중심으로 근본주의 운동을 일으켰고, 이슬람교는 이란 등에서 근본주의 운동의 불꽃을 피웠다. 이러한 근본주의는 대체로 강한 권력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기 종교 이념의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해 타종교나 이념들을 이단 또는 적으로 삼고 그들을 공격한다. 근본주의는 성자 정신을 언어 속에 가둔다. 우리가 성자들의 정신을 배우고 깨닫는 것은 성자들의 가르침(경전의 언어)을 통해서다. 성자들의 가르침은 결국 자연으로부터 왔다. 성현들은 끝없는 자기 질문을 통해 자연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대종사님 모두 끝없는 질문을 던진 대상은 자연이었다. 거기서 이분들은 한결같이 모든 인류에게 쏟아지는 햇빛(자비, 은혜, 사랑)을 느끼고 옹졸한 인간들의 관념(지위, 욕망, 아집 등에 갇힌 정신)을 넘어서야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러한 것을 가르치기 위해 열정적인 삶을 살다 가셨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는 그러한 성자적 질문(깨달음을 향하고자 하는)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가신 성현들의 말씀에만 매달린다.

2. 우리는 어떠한가?
대종사님께서는 우주와 자연에 대한 질문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끊임없는 질문의 연속이었다.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타종교 경전들을 열람하셨다. 그리고 그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장 호대하다고 생각하시고 불교를 연원종교로 삼으셨다. 원불교의 명칭도 불교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고, 대종사님 당시에는 불법 연구회라고 하였다.
원불교의 관행은 어떠한가? 일요법회, 법회 절차 등은 개신교를 닮았고, 중앙집권제 및 지방 분권제의 진행 등은 천주교를 닮았고, 수행은 불교를 닮았다. 이것은 한 때 훌륭한 능동적 창조였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행으로 변화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린 지금 우리들만의 독특한 무엇을 강조하면서 변화를 멈추려 한다. ‘열 사람의 법을 보아 가장 좋은 법을 믿고자 하는’ 자세를 버리고 우리 법이 최고인데 뭣 때문에 이곳 저곳 기웃거리냐고 아우성이다. 배움을 지조없는 자세로 치부한다.
세계화, 세속화의 세계 질서 속에서 자기 변용은 미덕이요 장점이다. 시대에 맞지 않은 줄 알면서도 기성복을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문제는 누가 ‘시대에 맞고 안 맞고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다. 내게는 그러한 권한이 없다고 생각한다. 교단의 지도층에서조차도 ‘나는 대종사님의 정신을 이어가는 중간자이지, 판단을 할 권한을 위임받은 전권자는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아이러니는 판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한 순간도 판단과 결정을 유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본 정신을 강조하면서 대종사님의 진리에 대한 질문, 자신에 대한 질문, 제자들에 대한 질문 등 끝없는 탐구 자세는 실종되고 대종사님께서 어떻게,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에만 초점을 둔다. 대종사님께서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이고 또 대종사님께서 제기하신 질문에 입각하면 이 문제는 어떻게 탐구해나가야 할 것인가’를 질문하지 않는다. 그러한 질문은 불경스런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네가 누구길래 그렇게 판단하려 하느냐고 생각한다.

3. 대종사님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계신가?
대종사님은 우리에게 내 법만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셨나? 불법연구회를 만드실 때, 불법연구회는 자동적으로 ‘진리적 종교’라고 판단하셨는가? 진리적 종교가 되려면 어떤 종교이어야 하는가를 질문하지 아니하고, 원불교는 진리적 종교라고 생각한다면 원불교 정전의 대부분 내용들이 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정전의 내용들은 그냥 믿으라는 내용이 아니라, 이러 저러한 진리를 깨달으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상세히 밝혀주시고 계신다. 천지·부모·동포·법률이 은혜인줄 알아서 그냥 감사하고, 보은하라고 가르치지 아니하시고 “만약 천지·부모·동포·법률이 없다고 한다면 네가 단 한 순간이라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가 생각해볼지니, 그런다면 아무리 천치요 하우자라도 ○○없이는 살지 못할 것을 다 인증할 것이라...”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우리에게 생각과 깨달음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를 설득하고 우리의 판단을 요구하고 계신다. 대종경 실시품 2장에서 ‘좌선을 하지 않는다고 어린 상좌를 꾸짖는 노스님들에게 좌선을 하고 안 하고는 상좌의 몫이고 당신들께서는 저 상좌로 하여금 좌선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이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록…’이라 하셨고 ‘저 산의 금을 캐어서 써보라 그러면 사람들이 저절로 금을 캐고자 달려들 것은 자명한 것처럼…’이라고 설득하고 계신다.
우리는 각자에게 깨달음을 위한 진지한 자기 질문을 잊고 있다. 그리고 원불교는 진리적 종교이니까 원불교 교법만 믿고 따르면 업을 소멸하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종사님 가르침 어디에도 원불교만 믿고 따르면 저절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곳은 없다. 내 가르침을 깨닫고 실천하면 스스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원불교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의 강조는 원불교를 병들게 하고 있다.
신앙은 빌려오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법을 담는 그릇이요, 그래서 신앙을 가진자만이 살아 있는 나무가 햇볕을 받아 싹을 틔우듯 법의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법을 담는 신앙의 그릇을 키우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끊임없이 법을 담고자만 노력한다. 그릇을 키울 수 있는 것은 자기 성찰,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맹목적인 믿음만 가지고는 그릇이 커지지 않는다. 왜 대종사님께서는 매일 정전의 말씀들을 암송하고 반복하도록 가르치지 아니하고 감각 감상을 적어보고 발표해 보라고 가르치셨는가? 당신의 깨달음을 그냥 빌려서 담으라 하시지 아니하고, 각자의 느낌(想)과 깨달음(覺)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끝없이 추구하라고 가르치셨는가? 각자가 느끼고 깨달음을 키워 나가다 보면 결국 내 깨달음을 이해할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바다물이 짜다’는 가르침을 평생동안 외우고 믿는 것보다 한 번 찍어 먹어보고 느끼면 그 순간 결코 잊을 수 없는 느낌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원불교를 깨닫고자 하지 아니하고, 원불교를 믿고자만 하는가? 교무님들이 믿으라고 하니까? 그러면 우리가 기독교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기독교는 믿으면 곧 구원이 보증된다고 하지만 대종사님은 ‘각자의 정업은 부처님이라도 면할 수 없다’고 추상같이 밝히셨다. 누구도 구원을 보장해주지 아니하고, 각자의 구원은 각자의 몫이라고 가르치는 원불교에 와서 그냥 원불교에 기대어 업을 소멸하고 천도하고자 하는가? 성자들의 가르침은 성자들이 깨달으신 진리로 향하는 지렛대이다. 우리가 대종사님께서 직접 깨달으신 자연을 향하여 끝없는 질문을 하는 것은 불경스런 것이 아니다. 오늘날 원불교의 문제점은 자기 깨달음을 향한 자기 질문을 하는 원불교인이 적이다. 기독교처럼 믿으면 저절로 구원되리라고 생각하는 맹목적인 신앙 때문에 원불교가 내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4. 어떻게 할 것인가?
자그만 자기 깨달음을 끊임없이 축적해 나가고, 그것을 겸허로 쌓아가지 않는다면 우린 대종사님께서 새 종교를 여신 뜻을 망각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축적해 가되 겸허로 쌓아가자고 말씀드린 이유는 자칫 자그만 앎이 축적되기 시작하면 그 앎이 새로운 앎의 도입을 방해하는 편견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조용히 실천해야 한다. 원불교인들 모두 오늘날 우리 교세의 빈약함에 주눅들어 한다. 그러나 주눅들 것은 현재의 교세가 아니라 미래의 원불교 모습이다. 교화는 문화적 흐름과 인적 그물 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문화적 흐름은 매우 중요하다. 미국이 해방 후 우리 나라를 문화적으로 지배하면서 그들의 지식, 종교, 사회체제 등은 거의 신들린 것처럼 우리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왜 우리가 석존성탄일은 쥐죽은듯이 지내면서 크리스마스면 젊은이들은 열병을 앓는 것처럼 1-2개월 전부터 뒤흔들리는가? 그것은 문화의 조류가 사회 체제의 변동과 함께 그렇게 흘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대한 흐름 속에서 오늘날 서구화의 물결이 너무나 강력하고, 그런 상황에서 동양 종교에 대한 문화적 호기심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다.
그런데 문명은 대세는 있지만 어떤 문명도 다른 문명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문명은 접목되어 공존한다. 불교 문화가 20세기 후반 들어 다시 서서히 부각되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원불교는 이러한 문화적 자기 반성 내지 역류에서 어떤 상태인가? 우리는 기독교가 성장할 때 성장하였다가 기독교가 정체하며 불교가 약진하는 시대에 정체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제도와 관행들(기독교화된)이 내용들(불교적)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적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조류가 서서히 내·외적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느낌과 깨달음을 소홀히 하는데 익숙해왔다. 우리는 교무님 말씀은 듣는데 익숙해 왔지만, 우리 스스로 깨달음을 추구하는데는 익숙해오지 않았다. 이러한 내적 관행과 체질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더욱 힘들 것이다.
깨달음의 종교는 교세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교세가 약하면 왠지 위축된다. 대종사님은 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고서도 심독희자부(心獨喜自負: 마음이 홀로 기뻐서 스스로 뿌듯해 함)하였지만 우린 누군가 옆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왠지 자신감을 잃는다. 그것은 20세기의 증후군(syndrome)이다. 과거에는 상대적으로 자부를 외부로부터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만족하면 그걸로 얼마든지 뿌듯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남이 알아주어야만 내가 나를 인정해주는 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동료들이 적으면 위축되는 것은 당연하다. 교세가 작으면 위축된다. 당연한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원불교 교도 증가는 가두 설득이나 가구 방문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랜 동안의 연구 결과 확인된 사실이다. 종교는 가족에 의해 전파된다. 그런데 가족의 종적(세대간 종교적 전승) 교화가 매우 약한 것이 불교나 원불교의 특징이다. 그러나 자녀들이나 이웃에게 ‘자신을 성찰하고 인생을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종교로서 원불교의 모습’을 접하게 해주고 싶어한다면 이것은 바람직한 행동일 것이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나가고, 그것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는데도 그 사람들이 함께 할 의사를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깨달음의 추구·실천을 포기하고 맹목적인 신앙에 갇힌 채로 원불교를 그들에게 권하면 그들은 이왕이면 유명 상표를 선택하고 싶어하는 본능을 따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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