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교화는 교법의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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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교화는 교법의 세계화
  • 전재만
  • 승인 2002.02.2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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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보은회원분들이 10년의 짧은 모스크바 교화에 큰 힘을 실어주어 감사의 마음 갖고 살고 있습니다.
29년만에 한국에 들어와 보니 고국이 너무나 좋습니다. 장기간 고국을 떠나 해외 교화라는 서원 하나만 가지고 살아왔는데 그곳의 생활과 해외교화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며칠 고국에 있으면서 해외와 비교해 보면 해외는 정말 혹독한 눈·비·바람이 몰아치는 현장입니다. 반면에 고국으로 돌아와 보니 고국은 너무나 따뜻한 곳입니다. 고국이란 고국에 살건 살지 않던 항상 따뜻한 존재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노란병아리
1984년 18년전에 뉴욕에서 훈련 장소를 찾으러 다닌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캠프를 하려고 하는데 백방으로 캠프를 찾아다녔지만 20군데서 퇴짜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사회인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불교라는 이름만 들어도 거절을 하더군요. 20여군데 퇴짜를 맞고 실망한 가운데 한분으로부터 펜실베니아 포크너라는 곳은 받아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오은 교무와 같이 찾아가서 2주간 캠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인연이 닿았던지 개발회사에서 좋은 땅이 있는데 살 의양이 없냐고 물어왔습니다.
그곳에 찾아가보니 지대가 높은게 정말 좋더군요. 땅 매입도 아주 싸게 할 수 있었습니다. 2만불인 땅값을 1만5천불에 샀습니다. 평수로는 2천4백평에 계약을 했습니다. 그래서 훈련원을 짓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개발회사가 주민들과의 알력싸움의 방패막이로 우리에게 땅을 팔았던거더군요. 미국이라는 곳이 아직도 겉으로는 아니지만 속으로 인종차별이 참 심한 나라입니다. 주민들이 저희 훈련원을 상대로 고소를 했습니다. 고소이유가 화장실을 크게 지었다느니하는 말도 안되는 것들을 열가지 정도 써 놓았더라구요.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면 안되겠다 싶어 변호사를 고용하여 맞섰습니다. 졸지에 저희 신세가 개발자와 주민들간 다툼의 중간에 끼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주민들 800여명이 모여서 우리들을 부르더군요. 그러더니 주민들이 우리들을 향해 “통일교 돈을 받지 않았느냐?”고 묻더군요. 진실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고용했던 변호사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소련과 미국이 핵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끼어 노란색 병아리 한 마리가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라고 주민들에게 말을 하더군요. 개발회사와 주민은 소련과 미국이고, 저희들은 노란 병아리에 비유한 것이겠죠. 그렇게 해서 훈련원을 짓게 되었습니다.
전 이 말이 참 잊혀지지 않습니다. ‘노란색 병아리 한 마리가 왔다갔다한다’ 이 말을 되새기면서 강한 사람들 속에서 서원 하나만을 가지고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항상 걱정이 되었습니다. 30년동안 교화를 했는데도 양 대국을 다니면서 교화를 하는 것이 너무나 큰 서원을 세우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가 해외교화를 하는 목적은 대종사님의 교법을 세계화하는 것에 있습니다. 보은회 회원님들은 30년전부터 교법의 세계화를 위해 일원의 종자를 뿌려주시니 이 얼마나 큰 일을 하고 계십니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1970년대 초에 한국이 참 못 살던 나라였죠. 경제개발을 하느라 모두들 힘들었죠. 저희가 해외에 나갈때는 100불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미국이라는 곳에 갔는데 그 곳에서 직업적인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살기가 참 막막하더군요. 그래서 노동일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아무 재주도 없이 12가지가 넘는 직장일을 했습니다. 지금 동남아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노동을 하듯이 노동일을 했습니다. 청소부터 시작해서 아이 돌보기까지 해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교당을 유지해야 할 처지였죠.
미국이라는 곳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어 많이 벌어봐야 600불을 벌기가 힘듭니다. 교당세도 내고 어른 두 분을 모시는데 음식 사 먹을 돈이 없어서 그곳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받아 먹고는 했습니다. 식당에 그날 다 팔지 못한 음식이 있는데 8시나 9시가 되면 전화가 옵니다. 식당 주인분들이 저에게 전화를 주시고는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면 저는 그날 팔다 남은 음식을 챙겨오곤 했습니다. 하루는 음식을 받으러 갔는데 집에 도착해 벨을 눌렀는데 어르신들이 열쇠를 두고 나오셔서 문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의 집들은 열쇠없이 나오면 문이 자동으로 잠겨 열 수가 없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주위에 건타원님 아드님이 퇴근을 하지 않아 경찰에 연락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어르신들이 “상원이는 심청이여, 우리는 심봉사”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군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두 분을 잘 모시지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저는 항상 해외교화를 하는데 원불교 간판만 떨어지지말라고 기도 기도 드렸습니다. ‘모진 바람이 불어와도 이걸 계기로 뿌리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었습니다.
이번에 러시아에서 미국에 들어가는데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LA교당 봉불식이 9월에 있을 예정인데 미국만해도 동부교구 11개 교당 서부에서 8개 교당이 교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초창기때 교화를 생각하니 현재는 교화가 활발히 이루어져 너무나 기쁩니다. 백인들이 법당에 가득차서 법회 보는 것을 보면 참으로 좋습니다.

모스크바
모스크바에 가게 된 동기는 원광 한국학교라는 곳에서 소련에 아카데미 초청이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해서 기독교 등 여러 단체에서 20명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인연이 되었던지 안내자가 원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모스크바에 교당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적대국으로 살아서 연고자가 없었는데 그곳에는 시베리아에서 온 고려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민족의 북방교화를 지금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3년 동안 계획을 세웠습니다. 뉴욕교당 교무를 겸직하면서 소련이 무너지기 전에 종교법인으로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소련은 무너졌지만 소련내 보수와 개혁 세력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세 번의 전쟁이 있었는데 정말 암담하더군요. 특히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빵도 없고 계란 하나 구하기 힘든 곳이라 사람들은 험악해지고 심지어는 여자 교무님들이 강도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물러서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학교를 개교하게 되었습니다.
개교하고 졸업을 하는 날, 그곳에 고려인들이 자기의 조국이 무엇인지도 몰라 노래를 부르면 러시아 노래를 불렀는데 한국 노래를 부르면서 졸업을 하니, 엉엉 울었던 생각이 눈에 선합니다. 자신들이 정당한 민족으로 한국말을 쓸 수 있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엉엉 울었습니다. 고국이라는 개념이 없이 사니 잘 모르시겠지만 그들에게는 참으로 간절하고 절박한 것이였죠. 지금까지 저희 학교를 통해 총 3500명이 졸업했습니다. 현재 원불교에 입교한 분은 300여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민속잔치를 하는데 민속잔치라는 것이 타민족들과 함께 하는 화동의 마당입니다. 삼동윤리(三同倫理)가 배어있는 행사지요. 전통문화를 타민족에게 알려주고 민족과 민족의 문화가 만나 화기로운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효(孝)사상입니다. 어버이날 러시아 노인들을 초청해서 동양의 효사상에 대해 들려주니 부러워하면서 자신들도 그렇게 만들겠다고 하더군요. 또한 동양의학을 소개했습니다. 교당 터와 유치원 건물을 짓는데도 애로 사항이 많았습니다. 돈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공산주의 나라였던 곳이라 사고 파는 것에 익숙치 않아 준비하는데만 2년이 걸렸습니다. 보은회원님의 성원과 지원에 힘입어 무사히 봉불식을 마치게 되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제가 봉불식을 하기 전에 러시아 스탈린 시대에 비밀경찰(KGB)에게 죽어간 러시아 인들을 위로하는 천도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 KGB건물이 지하 20층이였는데 비밀경찰들이 차로 시체를 실어서 갔다 버렸답니다. 비밀 경찰 자신도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비참했답니다. 그러니 오죽 원귀(寃鬼)들이 많겠어요. 그래서 천도재를 하려고 했는데 자신이 없었습니다. 나보다 힘 있는 사람이 해야한다는 생각에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용기를 내어 천도재를 준비하려고 하니 법절차가 그렇게 까다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곳 시장이 원한이 너무도 깊어 아무도 손대지 못했는데 종교계에서 처음으로 이루어 낸 일이라고 하더군요.

9·11 테러
9·11 테러 때에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봤는데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 큰 건물이 무너지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저는 미국의 자존심인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 교법의 필요성을 간절하게 실감했습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씀처럼 마음가짐이 나쁘면 물질이 많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빌딩 붕괴 사건 이후 백인들이 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맨하탄 교당이 크지 않은데 빽빽이 앉아서 법회를 보고 있습니다. 유엔 사무처에서는 저희들을 보고 선법회를 보아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입니다. 요즘 기독교 교세가 약해지고 있는데 빌딩 붕괴 이후 교회가 가득찬다고 합니다. 미국인들이 물질문명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거지요. 종교가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며 종교의 역할에 대해 바라는 것이 많아졌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살아갈 때 필요한 도구이지 근본은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소유의 소유를 배워야만 합니다. 형상 있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니다. 강자·약자 공부를 강대국의 국민이 진작 알았다면 약국을 포용해서 그런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역에 보면 64쾌 중에 가장 마지막 쾌가 겸손할 겸(謙)괘 랍니다. 양보하고 포용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보은회원들에게 감사드리며 대종사님의 교법을 세계화하는데 이 자리에서 꼭 한 역할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전재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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