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연마와 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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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연마와 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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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9.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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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 안이정 종사
대종사님께서 깨달은 진리
대종사께서 어린 나이에 우주자연 현상을 보시고 ‘저 하늘은 어찌하여 저렇게 깨끗할까. 그런데 저렇게 깨끗한 하늘에 어찌하여 바람이 불고 구름이 생기고 비가 오는 것일까. 우주를 관할하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하는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20년 구도 끝에 마침내 깨달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종사님께서 깨달으신 것이 무엇인가.
먼저, 우주만유의 근원이 되는 우주의 원리를 깨달으셨습니다. 그 후 어떻게 이것을 깨달았는지 지난 일들을 회상하다 사은의 도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은(恩)을 발견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세상에는 복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죄를 받는 사람이 있더라. 과연 죄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모든 것이 각자가 짓고 각자가 받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음양이 상승하는 도에 따라서 선행자는 상생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상극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 내는 조물주가 누구인가. 그 조물주는 다름 아닌 각자가 조물자라는 것을 알게 되셨습니다. 왜 각자라고 하셨는가. 각자의 심신의 작용에 따라서 좌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누가 나를 만들어냈느냐고 하면 부모님이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모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그 자녀들을 만들어낸다면 어느 부모가 자식을 못나고 잘못된 자녀를 원하겠습니까. 모든 부모의 심정은 미모가 아름답고 마음씨가 고운 자녀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마다 종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생 동안 지은 것이 하나의 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마치고 다음 생을 맞이할 때 육신은 껍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껍질을 벗겨버리면 영식이 뭉쳐져 다음 인연 따라 모태 중에 자라나게 되는데 이것이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종자는 무형한 존재로써 영식 혹은 영혼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다음생의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얼굴을 보면 모두 각각입니다. 왜 각각인가. 우리 본래의 심성은 원만구족합니다. 그런데 과거 무시일부터 현재까지 각각 익힌바 습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개성 따라서 이렇게 나타나는 인품들이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똑 같은 분이 한 분도 없습니다. 그것은 각각 지은바 그 업식이 각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각자가 만들었기 때문에 얼굴이 전부 틀립니다. 비슷한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어딘가 분명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한 가지 의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모습은 각기 달라도 대개 부모를 닮았는데 왜 그럴까. 그것은 한 종자가 비옥하고 토후한 땅을 만나면 건강하게 자라지만 앙상하고 메마른 땅을 만나면 앙상하게 나오지 않습니까. 부모의 영향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은 중에 부모은이 있습니다. 내가 자력이 있을 때까지 양육해주시고 가르쳐주시는 것에 따라 익히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에 부모은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성리인가
대종사님께서 대각하신 후에 나만이 이러한 진리를 알고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대자비심으로 누구나 다 알고 깨달아서 참된 삶을 살아가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교화에 나서셨습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설해주셨는데 반응이 없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내가 깨닫기 전에는 깨닫지 못해 한이었는데 이제는 이것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며 한탄하셨습니다. 그 때의 심정을 담은 노래가 탄식가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심오한 진리를 모든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문득 느낀 것이 바로 원이었습니다. 우선 원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이 되도록 형상으로 표현해 주셨습니다. 또한 대각일성으로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그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다’고 말로 표현하여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형한 진리를 형상과 말로 표현해 주신 것이 바로 성리입니다.
교화방법으로 이렇게 해주니까 잘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원상을 교법의 종지로 나타내주셨습니다. 그래서 교리도에 보면 맨 위에 일원상이 있습니다. 아래로 신앙문과 수행문으로 표현해 주셨습니다. 즉 우리 교법 전체가 성리를 밝혀주신 것입니다. 원래 언어와 형상으로 표현 할 수 없는 진리를 언어와 형상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참된 진리를 누구나 알도록 밝혀주신 것이 바로 성리입니다. 그런데 성리하면 격외법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바로 진리를 누구나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것이 성리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는 충분한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나 알 수있게 설명을 해줄 수 있어야만 성리를 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견성을 한 사람입니다. 즉 성리를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리를 통하지 않고서 견성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불가에서는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 자리는 말로 할 수 없는 자리므로 격외법문으로 주고 받음으로써 상통하면 견성을 인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마음이란
여러분들 마음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마음도 역시나 진리와 같은 것입니다. 무형한 것이기 때문에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한 때도 마음을 떠나서 살 수 없는데 그 마음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은 일생뿐 아니라 영생의 동반자입니다. 부부를 일생의 동반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살고 떠날 수 없죠. 그렇지만 이 마음은 한 때도 떠나지 않습니다. 항상 나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모르고 살죠.
그렇다면 마음을 아는 방법이 무엇인가. 천길 물 속은 알아도 상대방 마음은 모릅니다. 그런데 아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상대방이 울고 웃고 화내고 찌푸릴 때 그 사람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분명한 것은 이 무형한 것이 밖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개성이 각각이요 얼굴 모습이 각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첫째 진리를 깨달아야하고 둘째 자신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 짓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잘 살려면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심신(心身)을 원만하게 수호(守護)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 짓고 복 짓는 것이 마음으로 인해 입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근(六根)에 검문소를 두어야 합니다. 할 일은 하고 안 할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모르고는 살지 못하므로 일과 이치를 환히 알아가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일과 이치를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실지생활에서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나 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마음공부를 잘해야 되는데 우리의 교법을 보면 마음공부 잘 하도록 밝혀주셨습니다. 수행편 16장을 통해 마음공부를 잘하도록 밝혀주셨고 끝으로 17장 법위등급을 밝혀 자신의 공부 수준을 알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좌선의 표준
저는 20살 때 원불교에 들어와서 영산에서 처음 정산종사님을 뵈었고 총부에 들어와서 대산종사와 주산종사 그리고 대종사님을 뵈었습니다. 일여래 세 부처님을 모시고 살아왔습니다. 대종사님 당시에는 3개월 선을 마치고 마지막에 성리문답을 했습니다. 그 때 저도 성리 공부해서 견성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만 견성을 할 수 있는가. 과거 성인들은 30대 이전에 견성을 하셨습니다. 저는 늦어도 40대 이전에는 견성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의두 성리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옛말에 하루 저녁에 툭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7일간 통영(通靈)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꼭 한번 통영 해야겠다는 생각 중이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선(禪)기간이든 아니든 아침 좌선만은 남녀 불문하고 반드시 참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좌선을 잘해서 마음이 가라앉고 심령이 밝아지면 알아지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좌선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대종사님께서 저를 부르시기에 조실에 갔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조실에서 선을 하시다가 지그시 눈을 뜨시더니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 좌선 잘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 좌선 빠지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좌선의 방법대로 합니다” “좌선이 잘되느냐” “예. 방법대로 잘하는데 일체 분별사량이 사라지고 원적 무별의 진경에 드는 것이 잘 안됩니다” 했더니 “바로 그것이다” 그러시면서 “좌선을 할 때는 목표를 바로 그곳에 두어야 한다. 앞에 방법은 바로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방법대로 하되 처음은 단전에 모든 생각과 기운을 거기에 머물게 해라. 집심(執心)이다. 그 다음 어느 정도 잘 되면 관심(觀心)이다. 잘되고 못 되는가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과 몸이 상쾌해진다. 수기(水氣)가 오르고 화기(火氣)가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게 되면 놓아라. 잘하고 못하는 것도 놓아버리고 관한다는 생각도 다 놓아버려라. 나도 처소도 다 잊어버릴 때 그 때의 마음이 바로 본래의 마음이다. 거기서 모든 마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 그 자리가 내 마음인 동시에 진리와도 막 통하는 곳이다” 그러시면서 그것을 표준잡고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깨어난 뒤에는 다시 단전에 그 마음을 멈춰두어 차분한 마음을 가진다. 그러다가 어떠한 경계에 부딪치면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 판단을 해서 옳은 일을 하고 그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일을 이렇게 해나간다면 한 가지도 그르치는 일이 없고 하고 싶은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바로 유시선이다. 일이 있을 때 하는 것이다. 일이 없을 때에는 항상 마음을 비우고 내 본래 마음자리를 지키고 일이 있을 때에는 그일 그일에 일심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면 동정일여(動靜一如)의 무시선(無時禪)이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궁극 목표이다. 즉 동정일여의 무시선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한 예화를 들어주셨습니다. “목수가 대패질을 하는 것을 보니 처음에는 거친 대패를 들이대더라. 어느 정도 골라진 뒤에는 몽근 대패를 사용하고 그리고 거의 골라졌을 때에는 아주 몽근 대패로 종횡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염불은 거친 대패와 같고 좌선은 몽근 대패와 같으며 무시선은 아주 몽근 대패로 종횡으로 사용해도 걸리고 막힘이 없어야 된다. 우리가 동정간에 모든 일을 하는데 어떤 일도 걸리고 막히는 일이 없이 해내는 것이 바로 무시선이다. 그리고 우리가 견성을 하는 것은 내 본래 마음자리를 체험하면 초견성은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일과 이치를 연마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의두 성리이다. 우주의 원리와 인생을 연마하여 그것을 깨달아 막힘없이 알아야 견성한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 좌선의 표준이 잡혔습니다. 또한 삼학 공부를 통해 삼대력을 얻고 모든 일에 마음을 잘 써서 걸리고 막힘이 없으면 견성과 성불을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성의 표준
그런데 견성의 표준이 어떤 것인가. 어떤 것이 견성한 것인가. 그 표준이 확실히 잡히지 않아서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께서 일원상 법어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래서 견성의 표준이 바로 일원상 법어입니다. 원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것이기에 육근을 작용하는데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근이 본래 원만구족 지공무사하게 갖춰있는데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육근을 잘 수호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양성과 솔성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견성 5단계를 통과해야 합니다. 대종사님께서는 교법을 통해 아주 자세히 밝혀주셨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데 아주 수월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다음 마음 원리를 알려면 추궁해 들어가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보은법회가 있으니까 가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의 근본은 갈까 말까하는 분별심입니다. 그렇게 분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입니다. 마음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신입니다. 정신이 들어서 마음을 좌우합니다. 정신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본래의 성품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대종사님과 성리문답
한번은 3개월 선을 마치고 성리문답 시간에 직접 대종사님과 문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의리선(義理禪) 도리(道理)를 말 할 때에는 대종사님께서 직접 주편을 잡으셨습니다. 그때 말씀이 “만법귀일 일귀하처(滿法歸一 一歸何處)인데 우주 모든 것을 똘똘 뭉쳐서 하나인 것을 말해보고 그 하나인 것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여래선(如來禪) 도리나 조사선(祖師禪) 도리는 어물어물해도 괜찮았지만 의리선 도리는 말로 설명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막히면 안 됩니다. 저는 용감하게 거수하여 문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하나는 기운입니다” “왜 기운이냐” “이 우주만물이 모두 하나의 기운으로 통해 있습니다” “한 기운이 통해있다면 어느 것이나 기운이 통하지 않는 것이 없겠구나” “그렇습니다” “한 기운으로 통한다면 다 알겠구나. 그렇다면 지금 허공에 기러기가 날아간다. 그 때 포수가 총을 쏴서 기러기를 맞췄다. 그 기러기는 총알을 맞아 오죽 아프겠느냐. 그런데 포수는 자신의 총탄에 맞아 떨어지는 기러기를 보고 통쾌히 여길 것이다. 한 기운으로 통해있다고 했는데 기러기의 아픔을 포수가 느끼겠구나. 내 몸도 한 기운으로 통해 있지 않느냐. 그래서 어느 한 구석이 아프면 직감적으로 알게 되어 있다. 또한 몸 한 구석에 상처가 있으면 다 같이 고통을 느끼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기러기의 아픔을 포수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운이 통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기운이라는 것은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기운과 감각은 다른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느냐?” 그런데 제가 대답을 못하니까 벨을 눌러 버리셨습니다. 벨을 누르면 발언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때 부터 저는 또 하나 의심이 걸렸습니다. 기운과 감각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그러다가 정산종사의 영기설(靈氣說)을 듣고 그 의심이 해결이 되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사람이 나이 40이 되면 죽음 보따리를 챙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나 돈은 죽어도 못 가져갑니다.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뿐만 아니라 육신도 놓고 가는데 무슨 보따리를 어떻게 챙기라는 것일까요. 각자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기 때문에 마음 수양(修養)을 해야 합니다. 대종사님도 역시 과거 몇 생을 통해서 수양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인품을 가지고 태어나신 것입니다. 현재 사진으로 그 인품이 다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종사님을 직접 모시고 살았는데 대종사님 용모는 원만구족해서 어디 하나 흠집이 없는 상입니다. 용모뿐 아니라 사상역시 원만구족합니다. 원만구족한 인품을 가지신 분입니다.
또한 가난과 부자는 바로 얼마나 복을 짓느냐에 따라 나타납니다. 복을 못 지으면 어디가나 가난한 곳에 태어납니다. 지은 복은 반드시 받게 됩니다. 농부가 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공을 들였기 때문에 가을에 수확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 짓지 않고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하 사람이 있고 귀한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는 사람은 영대가 밝아 영리합니다. 그런데 배움이 없고 깨우침이 없는 사람은 어디가나 천대를 받습니다. 어디가나 남을 공경하면 대중으로부터 환영을 받습니다.
어디가나 인연작복(因緣作福)을 많이 지으면 인연을 잘 만납니다. 특히 인연은 먼데보다 가까운 사이에서부터 좋은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좋은 인연을 두루두루 맺어놓으면 어디가나 인연들이 도움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과거 석가모니 부처님은 500생을 닦아 3000천년 동안 귀대를 받게 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더욱 오래 닦으셨기 때문에 5만년 대운을 타고 나셨습니다. 인연작복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구의 몸을 받지 않으려면 남을 살리는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을 통해서 진강급을 하므로 항상 진급이 되려면 계속 수행 정진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육신을 새로 받기 때문에 생사에 대해 깨달아야 합니다.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산종사께서 “생사가 본래 없고, 생사가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닫는 것을 연마하여 생사가 없는 자리를 그대로 베풀어 쓰면 가고 오는데 아무런 걸림이 없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생내지 영생을 위해서 잘 살려면 진리와 우리의 마음을 알아야합니다. 모든 죄복이 마음공부 여하에 있으므로 열심히 공부해야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리라는 것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을 밝혀주신 것이니 다같이 공부해서 잘살도록 심축드립니다.
<정리 김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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