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별기획]백년을 넘어, 원불교의 새 길을 찾다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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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별기획]백년을 넘어, 원불교의 새 길을 찾다⑵
  • 관리자
  • 승인 2016.01.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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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별기획]

"고난을 감수해야 성장한다"

박대성 편집장(이하 박) : 지금 한국 사회는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김용민 피디는 개신교 신앙의 배경(부친은 홍익교회 김태복 원로목사, 본인은 신학박사를 마치고 목사가 되기 위해 한신대 신학대학원 진학)을 가지고 계시니 한국 개신교의 공과(功過)에 대해 논한다면?

김용민 피디(이하 김) : 공과가 각각 있지 않겠나 하고 보는 것이 균형 잡히고 중립적 차원인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종교는 절대자 앞에서 넙죽 엎드리며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발견해야 한다.

개신교 같은 경우, 자신의 죄인임을 계속해서 고백을 해야 하는데 이런 문화가 실종되어 버렸다. 내가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을 했는데 남들보다 나아서 남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면 자격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구 보다도 스스로의 한계와 모자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면접 볼 때“거룩함으로써 차별화해야 하는데 차별로써 거룩하려고 한다”라고 얘기를 했다.

한국교회의 불행은'자기가 절대자와 동급의 위치에 올라섰다'고 생각하며 시작됐다. 그런 오만과 무의미한 자아도취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문제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으로서 서로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공동체로서 살라는 취지는 사라지고, 베푸는 자와 받는 자로 이분을 시켰다. 이것이 오만과 독선을 키우게 하는 원인이라고 본다. 쓸데없는 특권의식이 망쳐 놓았다. 그렇게 해서 좋은 일을 베푼들 무엇 하겠는가? 나는 신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거라고 본다.

: 김 피디는 개신교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음에도 여전히 개신교인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본인에게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 혹독하게 비판할 때 기준점이 없었다면 신앙을 버렸을 것이다. 제가 욕하는 대상들은'가짜'라고 본다. 사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하다. 역사적 맥락 속 개신교의 역할에 관련해서는 아버지와 나의 견해가 많이 다를 것이다. 아버지는 보수적인 신앙을 하셨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그런데 아버지는 사람마다 다 생각이 다르고 그 다름을 인정 하셨다.

보수적 신학에 기초해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만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다. 아버지께서는 청계천 맞은편에서 목회를 하셨다. 도시빈민들이 잔뜩 몰려있는 곳이라,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

또 교회가 한양대학교 근처라 대학생들이 많이 다녔는데, 학교에 대자보를 붙이면 떼어가고 잡혀가니까 교회 경내에다 붙였다. 그러나 아버지는“때라 마라”,“ 정치적 발언하지 마라”,“ 조용히 해라”이런 말을 안 하셨다. 다양성을 짓밟지 않는 온유함이 있으셨다.

나에게는 돌아가야 할 그런 기준점이 있다. '진짜'는 있다는 그런 믿음이 있어 개신교를 떠나지 않는것 같다.

: 일반적으로 세계 유수의 종교들이 창시되고 100년을 지나갈 즈음에 다양한 이견(異見)들이 나타났다고 본다. 개신교의 관점에서 예수 사후 100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 예수 사후 30년 지난 시점에 바울이 서신(書信)을 발표한다. 그리고 복음서가 집필이 되어 나왔다. 아마 다른 종교에 비해서 기독교는 당대에 이른바'교주'로 불리는 이를 만났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경전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신빙성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서에도 가필되고 포장된 것들이 분명히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일종의 축자영감(逐字靈感)식으로 한 글자, 오탈자마저도 다 진실이 담겨있고 영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주와 당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떠나고, 한 단계 건너 가르침을 들었던 사람은 신앙의 이해가 당대 사람들과 같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새로운 질서와 해석을 요구하는 2세대들에게서 발견되는 충돌과 갈등은 사실 주도권 다툼이다.

비폭력과 평화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기조였다. 그분은“전쟁 하지마라”는 말 자체를 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니까. '칼을 든 자, 칼로 망한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예수에게 있어서 평화는 상식이자 다른 이론의 여지가 없는 도그마 그 자체였다.

: 2016년, 한국에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실지?

: 나는 예수께서 역사 가운데 임재하고 있다고 본다. '왜 우리가 이런 비탄한 헬조선의 시대를 만나게 하셨을까'생각해보면 이것도 신의 뜻이 아닌가 한다.

성서의 핵심 줄거리가'십자가 없이 영광 없다'이다. 기독교인이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데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들은 십자가를 거역하는 사람들이고, 민중의 편에 서서 어렵고 힘들고 고통 받는 이들을 품에 안아주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고 있는 사람이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회변혁을 위해애쓰는 사람들이 실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이렇게 예수가 여러 사람의 정신 속에 들어 있지만은 당장 사회를 못 바꾸듯, 예수가 살아있던 그 시대에도 세상을 바꾸지 못 했다. 비참한 사형수로 죽은 거다.

: 원불교100년기념성업은 우리 원불교 인들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과제이다. 사실 본인은 지금까지의 백년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이후 백년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원불교 이제 이런 방향으로 가야하지 않겠나?'는 충고와 고언을 들려달라.

: 원불교에 대해서 제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쇼! 개불릭'에서도 얘기했지만 원불교가 교도 수가 급격하게 불어나지 않는 이유는 배타성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종교만이 길이요,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가. 절대자를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둥근 원을 만들자는 의미로 알고 있다. 모나지 않은 원형의 상태는 위대한 철학이다. 더구나 우리 민족에서 출발한 종교라는 점에서 봤을 때 원불교를 무척 존경한다.

다만 원불교가 사회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정의'라는 가치를 많은 종교들이 오도하고 있다. 종교가 권력이 편에 서지말고 가시밭길을 자초했으면 좋겠다.

구체적으로 국정교과서를 반대하고, 보편적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이루자고 주장하는 등 어떤 특정 정파나 후보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사회이슈에 대해서 명징(明徵)한 메시지를 냈으면 좋겠다.

설사 정권이 괴롭힌들 그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 오히려 교세가 커지는 것이다. 그래야'원불교가 뭐하는 종교인데 저렇게 해?',' 어떻게 저런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지?'라며 사람들이 감동 받을 것이다. 그래야 원불교가 추구하고 있는 진리를 세상에 전파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당장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이성을 찾아서 이 사회가 저주와 배척의 시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을 우리 원불교가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면 그분이 소위'좌 클릭'하니까 전 세계 사람들이 감동하고 놀라지 않는가? 이 시대는 자본이 정치는 물론이고 종교까지도 장악하고 있다. 이럴 때 세간의 풍조를 거부하고 가난한 자, 병든자, 사회적 약자들을 두둔하고 대변하는 교황이 나오니 얼마나 놀랍고 감동적인가? 이런 일들을 한국에서는 원불교가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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