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별기획] 백년을 넘어 원불교의 새 길을 찾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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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별기획] 백년을 넘어 원불교의 새 길을 찾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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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1.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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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별기획]

▲김근수┃가톨릭 프레스 편집장.
해방신학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철학과, 광주가톨릭대학교
2학년 때 독일 마인츠대학교 유학,
엘살바도르 UCA에서 해방신학 공부
●저서:『 슬픈예수』,『 행동하는예수』,『 교황과나』,
공저로『교황과 98시간』,
옮긴 책으로『해방자 예수』가 있다.

" 실천하는 신앙, 정의로운 신앙"

박대성 편집장(이하 박) : 천주교가 70~80년대 민주화의 과정에서 보여준 역할을 비롯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2014년)까지 확실한 한국의 주류 종교로 자리매김 되었다.

김근수 소장(이하 김) : 천주교가 이웃 종교에 비하여 사회참여가 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실제보다 과장된 평가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시국 미사를 포함하여 일부 사제들의 활발한 참여 때문에 천주교가 사회 개혁에 앞장서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 참여하는 신부들도 소수고 간헐적이다.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성직자가 대부분이다.

그런 아쉬움에 전체적으로 보면 4대종단(원불교, 개신교, 불교, 천주교)이 전부 다 낙제점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천주교가 사회문제에 정직하게 참여했는가를 알고 싶으면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사람에게 묻는 것이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 한국 사회에서 종교적 원로를 찾아보기 힘들다. 성철스님과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등 거목들이 돌아가신 상황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따른 국민들의 열광적인 관심과 이에 따른 사회적 현상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 교황은 분명히 개혁적인 분이고, 자주 모실 수 없는 훌륭한 분임은 틀림없다. 교황의 그릇이 너무 크다 보니 한국 천주교의 옹졸한 면이 감춰지는 효과가 있다. 한국 천주교는 오히려 교황 때문에 자기 개혁을 놓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천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신 이후에 더욱 보수화되고 있다. 상류층과 더 가까워지고 권력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본다.

: 한 종교를 역사적으로 놓고 보면 100년을 기점으로 해서 안정화 되거나 또는 교권 다툼 등을 통해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수 사후 100년 즈음의 분위기를 그려 달라.

: 예수 사후 100년 이후에 교회의 중심이 이스라엘 밖으로 옮겨 갔다. 바로 예수의 2~3세대 제자들은 이스라엘 밖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상대 했는데 바울을 중심으로 초대교회의 실권을 잡은 사람들은 가난한 이를 교회의 주축으로 삼은 게 아니라, 종교적 율법을 어떻게 지키느냐로 핵심 주제를 삼았다.

물론 교회 조직을 유지하고 성직자 제도를 만들고 신도를 관리하는 체계적인 제도는 많이 정돈 됐지만 성직자들의 권력화 현상이 나타나고, 권력구조가 수직화 된 움직임이 보였다. 결국 체제는 안정화됐지만 예수의 메시지는 더 약화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변방에서 탄생한 종교이고, 변방에 있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종교이다. 그런데 바울 이후로 대도시 선교에 핵심을 두고 중산층 위주로 신도들이 들어오면서 가난한 변방을 버렸다.

기독교는 슬프게도 100년 안에 복음공동체가 소멸되어 버렸다. 이스라엘 밖에 살거나 탈출한 유대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바울 계열의 교회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 '해방신학'을 전공(엘살바도르 중앙아메리카대학(UCA)에서 해방신학의 대가 혼 소브리노(Jon Sobrino)에게 배움)했다고 들었다. 해방 신학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 예수 이후 무려 이천년간 사장됐던 중요한 메시지는 예수는'가난한 사람을 역사의 중심으로 봤다'는 것이다. 이것을 해방신앙이 회복해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사회적 약자와 역사의 피해를 입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예수의 신앙과 가장 가까운 신학이 해방신학이다.

서구세계는 서기 313년부터 프랑스혁명이 발생한 18세기 말까지 가톨릭이 지배체제였다. 그러나 예수의 저항정신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사회적 약자가 희생되는 구조적인 악(惡)에 대한 저항을 가르치지 못했다. 그것을 해방신학이 회복했다. 그게 가장 큰 공헌이요, 메시지라고 본다.

전통적인 신앙에서는 인텔리로서 교육받은 현대인이 나와 예수와 1대 1로 대화했다면, 해방신학에서는 문맹과 가난, 정치적 압제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가 예수와 1대 1로 대화하는 것이다. '신앙과 이해'보다'신앙과 정의'가 그리스도에서 더 중요하는 것을 발견하고 발굴하는 것이 해방신학이다.

: 한국의 여러 종교가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서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종교계가 이를 현실적으로 거부하기가 쉽지 않고 자체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재원 마련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 어느 종교든지 몰락의 조짐은 국가가 지원하는 사업에 너무 치중할 때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사업에 집중하면 돈과 사람, 박수가 몰려온다. 그런데 이런 국비지원 사업에 치중하면 사회정의에 눈 감을 수 있다. 이것이 종교가 몰락하는 지름길이다.

정치권력은 종교를 사회복지 등의 국가 재정지원 사업 등으로 유인해서 종교를 장악하기 쉽다. 그래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사회복지 사업 등에 참여하는 것은 종교가 보수화 되고 정권에 복속되기 쉬운 지름길이다. 이유혹에 속아서는 안 된다.

: 올해는 총선이 있는 해이다. 정치권이 종교계의 문을 많이 두드릴 시기이기도 하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예수는 어떻게 보았는가?

: 남미의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이다. 독재자도 가톨릭, 독재자가 탄압하는 사람도 가톨릭 이다. 이럴 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되는가? 당연히 독재자를 비판해야 한다. 정치적 태도는 종교의 소속을 따라 정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정해야 한다. 예수도 현실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았지만, 권력을 비판하는 것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이 예수가 말하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다.

: 원불교가 한국사회에서 지난 100년 동안 큰 무리없이 성장했다. 한편 어느 정도의 정체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원불교가 한국사회에서 큰 의미를 전달하는 종교로 성장하기 위한 조언을 전달하고 싶다면?

: 두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하나는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가 전하고자 한 본래 메시지와 지금의 원불교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먼저 점검했으면 좋겠다.그것은 교도의 숫자나 재정(財政) 확보의 정도가 아니고 소태산의 뜻을 얼마나 실천을 했느냐 하는 것을 점검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원불교가 잘하고 있는지를 내부에서 토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원불교와 전혀 관계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원불교가 잘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이를 제대로 알려면 내부의 학자들이나 교도들에게 묻는 것 보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고립 받는 약자나 가난한 이들에게 묻는 것이 정직하다.

원불교도 지난 100년을 돌아봐서 창시자의 의도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가난한 사람과 가까운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되돌아보면 좋겠다. 근근이 조직을 유지하고 근근이 성적을 유지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하나의 종교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종교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 창시의 목적이 아니지 않는가? 가난한 사람들이 원불교가 얼마나 가깝게 느끼는지, 원불교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했는지를 살펴보고 지난 100년을 평가했으면 좋겠다.

개인 의견이지만 천주교나 개신교 등에서 보이는 대규모 인력 동원 행사는 안 했으면 좋겠다. 올해 백주년기념대회가 열린다고 하지만 대종사의 본의를 받든다면 행사에 들어가는 돈과 시간과 노력을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이 원불교다운 행동이 아닌가 하는 조언을 조심스럽게 드리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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