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혁명은 빈 수저의 움푹 패인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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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혁명은 빈 수저의 움푹 패인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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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3.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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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작가의‘인문학으로대종경읽기’11-02


니체의 위버멘쉬는 그동안 주로 초인(超人)으로 번역되어 왔다. 인간을 초월했다는 측면에서 초인으로 번역되어 온 것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장자 ‘소요유’의 첫 머리에는 그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곤(鯤)이라는 물고기와 곤이 변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붕의 등도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고, 한 번 날아오르면 구만리를 날아간다고 하였다. 한반도의 남쪽 끝과 북쪽 끝이 삼천리이니 곤과 붕의 크기가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곤과 붕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에 없는 곤과 붕을 장자는 왜 말했을까? 현실을 초월한 환상적인 초현실을 말하기 위하여? 그것은 아니다. 현실의 겉모양에 사로잡혀 세계의 본질이나 비밀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통렬한 비유인 것이다. ‘뭐 이런 황당한 게 다 있어? 무슨 새의 등이 우리나라 보다 커? 말도 안 돼.’라는 식의 의문은 지식이나 선입견에 갇혔다는 고백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자연과학의 물리적 객관성만을 따지고 든다면 세계의 그 어떤 비밀도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세계의 진짜 비밀은 현실의 객관성 너머에 존재한다. 그것을 알려주는 존재들이 바로 위버멘쉬다.


수운은 1824년에 이 세상에 왔고, 1860년 4월 5일 여몽여각(如夢如覺)의 상태에서 상제와 문답을 주고받으며 깨달았으며, 1863년에 처형당했다. 소태산은 수운이 하늘로 돌아간 30여년 뒤인 1891년에 태어났다. 소태산은 스스로를 수운의 환생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색신(色身)으로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다. 영혼과 사상과 생애로 이루어진 수운의 공신(空身)이 고스란히 소태산에게 전해졌다는 뜻인 것이다. 그리하여 소태산의 나이와 생애에는 수운의 나이와 생애가 보태져 있는 것이고 나아가 증산의 모든 것도 보태진, 조선 후기 최고의 공신(空身), 즉 위버멘쉬가 된 것이다.



수운의 동학은 19세기 조선 백성의 삶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렸을 때, 민중이 어떤 구원 혹은 구세주를 간절히 소망했을 때, 이 땅에 등장했다. 동학은 수운의 깨달음이 현실에서 구현되기를 소망했다. 현실의 참혹에서 벗어난 새 세상을 꿈꿀 수밖에 없는 백성의 상태, 무자비한 국가 폭력은 밥상에 올라오는 보리밥 한 숟가락마저도 가혹하게 가져가 버렸다. 백성의 빈 수저, 세상의 모든 혁명은 빈 수저의 움푹 패인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동학은 빈수저를 버리고 죽창을 들어 국가 폭력에 맞서기로 하였고, 새로운 세상을 스스로 만들기로 하였다. 현실을 바꾸는 혁명으로 동학은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의 반대가 있었지만 빈 수저가 칼이 되고 죽창이 되는 것
을 막진 못했다.


강증산은 동학의 현실변혁투쟁에 반대했다. 후천개벽이 폭력적 투쟁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간곡히 말했지만, 이미 봇물은 터진 뒤였다. 빈 수저의 숫자가 백만 개가 넘어서면 질적으로 다른 변화가 생긴다. 빈 수저들의 군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동학의 농민들은 빈 수저를 빨기보다는 그 수저로 국가의 솥을 바꾸기로 했다. 그러나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 유일의 근대적 군대로 성장한 일본군을 전근대적인 오합지졸 농민군이 당해낼 도리는 없었다. 죽창과 화승총으로 소총과 대포를 극복한다는 것은 물질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했다.


수운의 후천개벽은 현실 내부의 변혁을 통한 새로운 세상을 여는 폭력적 혁명주의였고, 증산의 후천개벽은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통해 상극의 선천시대를 상생의 후천시대를 여는 것이었지만 결국 현실 밖의 신비주의였다. 소태산은 수운과 증산을 위대한 사상가로 모셨지만 동학의 폭력적 혁명주의와 증산의 현실 밖 신비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소태산은 수운과 증산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꼈다. 만일 소태산이 수운과 증산의 대각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언급했더라면 일제에 의해 불법연구회는 동학에 버금가는 탄압을 받고 사라졌을 것이다. 소태산은 수운과 증산의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수운의 현실개벽, 증산의 천지개벽이 아닌, 정신개벽을 앞세운 역사적 맥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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