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없는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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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없는 주장
  • 관리자
  • 승인 2016.02.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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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법현 교도 / 북일교당


소태산은 대승불교의 흉내를 내는 당대의 소승불교를 비판했다. 조계종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선종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있는 게 아니었다. 선종의 전통이란 토굴이라는 이름의 암자에서 화두선을 틀어쥐고 십년 이상을 보냈다고 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도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선방에 앉아‘에헴’하는 선종불교는 더 이상 대승불교가 아니라는 인식이 소태산한테는 분명히 존재했다.


소태산은 소박하지만 결코 불법을 놓지 않는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의 생활적 대승불교의 새로운 회상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소태산은 달마의 무심(無心)과 원효의 일심(一心)을 스승 없이 법으로 받았고, 육조혜능의 선법(禪法)을 또한 스승 없이 법으로 전수받았다. 달마에서 혜능으로, 혜능에서 원효로, 원효에서 소태산으로 법이 이어졌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들이 전하고 받은 법은 오직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주는 자의 마음은 없었으나 받는 자의 마음은 있었고, 다시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전해 받는 마음이 없었다. 그렇게 마음 밖에서 이어지고 마음안에서 자리 잡았고 다시 마음 밖으로 전해졌으니 가히 부처의 전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혜능은 오직 견성을 종지(宗旨)의 안목으로 삼아 동태선(動態禪)·생활선(生活禪)·창조선(創造禪)을 주창했다. (혜능 지음, 광덕 역주, 「육조단경」, 불광출판사, 2012년, 22쪽) 소태산은 혜능의 삼선수행법을 무시선 무처선의 선수행법으로 받았다. 혜능이 준적은 없으나 소태산은 받았다. 혜능의 삼선수행법과 소태산의 선수행법은 서로 둘이 아니(不二)기 때문이었다. 소태산은 그 바탕 위에서 삼학과 삼대력의 공부법을 내놓았다.


“우리 마음, 우리 인격체도 이를 구성하고 총괄하고 버티며 앞날을 열어 갈 수 있는 삼대강령이 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정·혜·계(定·慧·戒) 삼학이라 하고, 원불교에서는 정신수양 · 사리연구·작업취사(精神修養·事理硏究·作業取捨) 삼학이라 하며, 수양력·연구력·취사력을 삼대력이라한다. 원불교와 불교가 비록 표현은 다르나 실상은 맥락을 같이 하면서 수행생활의 기준이 되도록 했다.”(이광정, 「마음수업」, 휴출판사, 2011년, 190쪽)


“우리는 이 모든 과목을 통일하여 선종의 많은 화두와 교종의 모든 경전을 단련하여, 번거한 화두와 번거한 경전은 다 놓아 버리고 그 중에 제일 강령과 요지를 밝힌 화두와 경전으로” 내세운 것이 정전과 대종경이며, “삼대력(三大力)으로써 일상생활에 불공하는 자료를 삼아 모든 서원을 달성하는 원동력을 삼게 하면 교리가 자연 통일될 것이요 신자의 수행도 또한 원만하게될 것이니라”라고 소태산은 말했다.


소태산은 삼학과 삼대력의 수행을 통해 견성하여 부처가 되라고 했다. 니체적으로 말하자면“내 자신이 신이 될 일이다.”(니체,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7년, 429쪽)가 되는 것이다. 견성은 깨달음인데,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인가? 견성이란 서양식의 자아(自我)를 깨닫고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나’풍년이다. ‘나’가 조금만 아파도 징징거린다. 그 징징거림을 힐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나’를 찾고, ‘나’를 위로하는 온갖 거짓의 인문학이 풍요롭게 펼쳐지고 있지만 정작‘나’에 대한 성찰은 없고‘나’에 대한 주장만 남아 있다. 주장만 있으니 갈등과 상처가 깊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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