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사람이 비로소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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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람이 비로소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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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7.01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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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 작가의 ‘인문학으로대종경읽기’ 11-03 / 정법현 교도(북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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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의 대각은 해월을 거쳐 손병희에 의해 인내천(人乃天)사상으로 결집된다. 인내천이 소태산에 와서는 인내불(人乃佛)이 된다. 사람이 곧 하늘이고, 사람이 곧 부처인 것이다. 이것이 원불교인 것이다. 원불교는 우리 민족의 내면에서 도도하게 흘러내려온 민중적 생명사상에서 탄생했다. 민중은 삶이 고되고 힘들어도 언젠가 올 미륵을 기다리며 한 생애를 '겨우' 견뎠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겨우' 견디는 삶을 꾸리면서 미륵과 한울님으로 상징되는 구원을 강렬하게 기다렸던 것이다. 구원을 꿈꾸는 것마저도 금지 당했다면 그 '겨우' 마저도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19세기 말, 민중의 가난은 서정주의 시처럼 '한낱 남루'가 아닌 배가 고프다 고프다 못해 숨이 끊어져야 했던 '참혹한 죽음'의 가난이었다. 가난은 낭만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인 굶주림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어찌지킬 수 있단 말인가. 존엄성 따위도 중요하지 않았다. 민중들은 굶주림의 벼랑 끝으로 한없이 내몰렸다. 불안이 쌓이면 불행이 되듯이 육체의 굶주림은
영혼의 피폐를 낳는다.

영혼이 피폐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행동마저도 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사람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요건마저도 박탈된 상태라면, 겉모양이 아무리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면 부처가 될 수 없다.

석가모니는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모든 개가 동등 하게 불성을 가졌단 말인가? 적어도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미친 개, 굶주린 개, 병든 개는 불성을 가질 수 없다. 미친 개는 온전한 정신이 없기 때문이고, 굶주린 개는 먹이에만 집착하기 때문이고, 병든 개는 육신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와 정신이 병들지 않은 '개다운 개'가 아니라면 불성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개가 사람 흉내를 내도 그 개한테는 불성이 없는 것이 된다. 본성, 즉 성품자리를 잃어버린 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태산은 '죽창을 들고 있는 사람은 부처가 될 수 없고, 이적(異蹟)이나 다투는 사람 또한 부처가 될 수 없다는것'을 알았다. 부처는 또한 현실과 아주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속에 앉아 화두를 잡고 정진하다가 문득 깨닫는 것 으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부처는 온전한 사람, 사람다운 사람일 때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성품자리를 보지 못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윤리적으로 완전하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사람일리는 없다. 윤리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얼마든지 많이 존재한다. 그들이 모두 부처는 아니다. 윤리적으로 훌륭하다고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태산은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견성하기를, 그리하여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 나기를 원했다. 생활과 유리되어 천상에서 홀로 폼을 잡는 부처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소태산은 그것을 알았다. 소태산은 몸과 마음의 수양, 만유의 법칙과 인과를 알아가는 성리 연구, 살아가면서 버려야 될 것과 버리지 말아야 될 것을 구분하는 취사를 통해 생활 속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을 밝혔다.

그 길은 영육쌍전과 이사병행을 통해 '천하의 모든 법이 다 한 마음에 돌아오는 길'이다. 그 길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만 비로소 부처가 될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다. 물론 자격이 있다는 것이지 부처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 길의 이야기를 소태산은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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