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한 알에도 갠지스 강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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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한 알에도 갠지스 강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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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8.1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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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 작가의 ‘인문학으로대종경읽기’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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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이 대종경 교의품 2장에서 밝힌 큰 도와 작은 도의 크기는 대체 어느정도일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크다'와 '작다'를 형상적으로 보여준 사상가는 장자다. 장자는 '내편內篇' '소요유逍遙遊'의 처음을 “끝없이 아득한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고 있는데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알 수 없다. 곤이 변해서 새가 되는데 이름을 붕(鵬)이라고 한다. 붕의 등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고,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르자 그 날개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다.”로 시작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이야기(寓言)가 아닐 수 없다. 곤과 붕은 현실에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길이는 삼천리이다. 남북으로 일천이백 킬로미터 정도의 길이로 반도가 뻗어 있는 셈이다. 붕이 날개를 펼치면 한반도를 덮을 정도이니 그 크기가 가히 상상이 된다.

박완식은 이 우언에는 “큰 존재가 크게 변하여 크게 노는(大物→大變→大遊) 경지를 말하고자”하는 장자의 뜻이 담겨 있다고 했다. 인간의 본성은 곤이나 붕처럼 지극히 크다. 우주에는 중심도 없고 테두리도 없으며 변두리도 없다. 그저 크기만 할 뿐이다. 지극히 큰 우주는 지극히 작은 물질에도 담겨 있다. 물질은 분자, 원자, 원자핵,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 소립자는 물질을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가장 작은 알갱이다. 원자의 크기는 1mm의 1만분의 1 정도이며, 원자핵은 1mm의 1조분의 1 이라고 밝혀져 있으며 소립자는 그 원자핵의 1만분의 1 크기이다. 물질의 최소단위인 소립자에 은하계 수십개가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지구 밖의 세계만 우주가 아니다. 우주는 그런 것이다. 겨자씨 한 알에도 히말라야 산맥과 갠지스 강이 담겨 있는 것이다.

“매미와 산비둘기가 웃으며 말하기를(수면으로 삼천리를 치면서 올라가 날개 짓을 할 필요 없이), 즉시 날아올라 느릅나무와 다목나무에 이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거기에 이르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내려앉을 뿐이다. 붕은 무엇을 하려고 구만리 남쪽으로 가려는 것일까?”
매미와 산비둘기는 곤과 붕에 비하면 참으로 작은 존재들이다. 그들이 지향하는 삶의 높이는 느릅나무와 다목나무의 높이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붕을 비웃는다. “조균(朝菌, 아침에 생겼다가 저녁에 마르는 버섯)은 초하루와 그믐을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와 땅강아지는 봄과 가을이 있는 줄을 모른다. 반면에 초나라 남쪽의 큰 바다거북은 오백 번의 봄을 맞았고, 오백 번의 가을을 맞이했다.”고 장자는 말했다. 아침 버섯은 쓰르라미의 일을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는 바다거북의 일을 알지 못한다.

매미와 산비둘기는 느릅나무 꼭대기와 쑥대밭에서 살고, 쓰르라미는 두 번의 봄을 맞이하지 못한다. 그들의 세계는 좁고 작다. 좁고 작은 세계에서 도달할 수 있는 도는 기껏해야 느릅나무 꼭대기인 것이다. 이처럼 매미와 산비둘기 그리고 쓰르라미는 작은 도의 세계를 상징한다.

반면에 곤과 붕 그리고 바다거북은 큰 도의 세계를 상징한다. 곤과 붕은 북쪽바다(北溟)에서 태어났다. 박완식은 “북
쪽이란 아직 만물이 발생하지 않은 현무의 땅이라고 했다. 바로 무(無)의 세계를 말한다. ”무는 아무 것도 없는 세계가 아니다. 무는 곧 공(空)이고 공은 곧 허공법계이다. 바로 그곳이 언어가 끊어져 버린, 도무지 말로는 어찌 설명할 도리가 없는 고요한 세계로 들어가는 어떤 장소인 것이다. 그 장소를 원불교에서는 마음이라고 한다. 고요한 무의 세계로 들어가는 마음을 통과하면 그 곳에 공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광대무변한 본성이 있으며, 법신불 사은과 일원의 진리가 있는 공의 세계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곤이 붕으로 개벽되는 공의 세계를 소태산은 처처(處處)라고 밝혔다. 처처에는 크기가 없다. 밀실이든 광장이든, 교당이든 공장이든 그 어느 곳이나 처처인 것이다. 그러나 개벽은 적공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적공이 쌓이고 쌓여야만 개벽이 일어나는 것이다.

소태산은 적공을 사사(事事)에서 찾았다. 일마다 정성을 다하는 것이 적공이다. 곤이 붕으로 개벽되기 위해서는 물고기가 날개를 얻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 날개를 소태산은 일원종지와 사은사요와 삼학팔조를 알고 실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소태산이 말한 큰 도인 것이다.

큰 도를 보는 것을 견성(見成)이라고한다. 너무 크면 눈에 보이지 않고, 너무 작아도 눈으로 볼 수 없다. 무변광대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것도 포함된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지만, 모두가 부처가 될 수는 없다. 견성하지 아니하면, 즉 무변광대한 본성을 보고, 곤이 붕이 되는 것과 같은 존재의 커다란 변화와 자유를 획득하지 못하면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크다고 해서 언제나 큰 것이 아니고 작다고 해서 언제나 작은 것이 아니다. 도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다. 애당초 비교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에 큰 부처와 작은 부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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