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 오피니언] '곡성'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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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 오피니언] '곡성'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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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8.22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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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천(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교수)

'곡성' 단상

-상상과 현실의 오버랩, 혹은 몽타쥬-

한울안오피니언(박종천).jpg
최근 영화 '곡성(哭聲, 2016)'이 개봉하였다. 나홍진 감독의 긴장감 넘치는 연출과 황정민을 비롯한 연기자들의 신들린 연기가 어울리면서 평론가와 관객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런데 필자에게 이 영화가 남긴 여운은 정작 다른 부분이었고, 그것은 종교와 영화에 대한 깊은 울림을 필자에게 건넸다.
먼저, 이 영화 제목이 지닌 이중적 함의에 눈이 갔다. 이 영화는 상영되는 내내 죽음의 그림자를 추격하는데, 그 과정에서 죽음과 연관된 곡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곡성'(哭聲, The Wailing)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런데 이러한 으스스한 소리가 관객의 귀를 붙드는 와중에 영화의 배경이 되는 전남 곡성(谷城)의 다양한 장소들이 관객의 시선을 이끌었다. 제목을 상기시키는 '곡성'의 한글 간판이 파출
소와 식당 곳곳에 붙어 있는 것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전혀 다른 한자가 동일한 한글로 문자화되는 동음이의어는 청각과 시각으로 오버랩되면서 곡성(哭聲)과 현실의 곡성(谷城)을 하나의 몽타쥬로 재구성했다. 실제로는 범죄 없는 마을로 구성된 이 한적한 지역은 동음이의어가 주는 몽타쥬 효과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선정되었다. 실제 현실과는 상관없이 지역 이름이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곡성(哭聲)'의 으스스한 판타지를 상상하게 만든 것이다. 곡
성(谷城)이라는 한가롭고 평화로운 일상의 현실 공간은 영화적 상상력과 몽타쥬 효과를 통해서 곡성(哭聲)이 난무하는 가상의 장소가 되었다.
영화 제목으로 지명을 채택하고 거기에 종교적 의미를 중의적으로 담은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密陽,2007)'은 경남 밀양을 배경으로 고통스런 현실을 종교적 의미로 성찰하면서 밀양의 한자어가 지닌 의미를 신의 은총을 뜻하는 '비밀스런 햇볕'[Secret Sunshine]으로 비유했다. 영화 곳곳을 비추는 따스한 햇볕은 도저히 수용할 없는 고통을 맞아 신에게 의지했다
가 신을 비웃기도 하는 일상적 인간의 실존적 현실을 구석구석 스며든다. 그렇게 현실의 밀양은 고통스런 현실에 스며든 햇볕으로 가득찬 종교문화적 장소로 승화되었다.
이 두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현실의 공간이 어떻게 상상의 장소로 변용되는지를 감성적으로 느낄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갈수록 줄어들던 곡성 지역의 인구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지역을 찾는다는 것이다. 영화적 상상과 몽타쥬 효과가 새로운 현실을 빚어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등장이 유대교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빚어내었고, 이슬람의 부상이 앞의 두 종교와는 다른 새로운 상
상을 가능하게 했으며,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이 각각 개성적으로 구성한 종교적 몽타쥬가 성지순례와 종교분쟁의 새로운 현실을 빚어냈다. 영화적 상상과 몽타쥬와 종교적 상상과 몽타쥬는 새로운 상상을 통해 기존의 공간을 새로운 장소로 재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일상적 현실과 상상적 이상의 몽타쥬를 통해 새로운 현실을 빚어낸다. 영화와 종교가 보여주는 상상은 언제나 현실을 넘어선다. 종교와 영화는 현실을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음으로, 외지인과 내지인의 관계설정이 특별히 눈에 띄었다. 영화 초반부에서 곡성을 지키는 수호신 여자(천우희 역)와 악마의 역할을 하는 일본인 남자(쿠니무라 준 역)의 대립 구도는 내지인과 외지인의 대립 구도를 전제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 대립이 한국의 무속 대 일본의 밀교의 주술적 대결로 연결되는 듯이 보였다. 여기에 박수무당(황정민 역)이 가세하면서 한국 대 일본의 대립 구도는 내지인 대 외부인의 대립 구도라는 틀을 더욱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의 추리를 뒤엎고 박수무당이 실은 곡성을 일으키는 악마의 패거리였음을 보여주는 반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반전은 한국 대 일본의 대립구도를 역전시켜서 보호의 여성성과 파괴의 남성성으로 전환시킨다. 내부 대 외부의 대립이 여성성 대 남성성으로 전환되는 것은 주체를 구성하는 타자성, 선과 행복을 파괴하는 악과 불행이 내부와 외부의 대립을 넘어서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적 선입견이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확연히 드러내 준다.

한울안오피니언(삽입용).jpg

게다가 영화를 통해 선과 악이 여러번에 걸쳐 뒤바뀌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영화 속 인물 속 의심과 의혹은 관객을 향한 미끼가 되어 현실로 들어온다. 새벽이 오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나,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죽어간 주인공이나, 기독교와 한국 민간신앙의 한계를 넘어서서, 우리네 삶은 새벽이 이르기 전까지 의심과 의혹에 쌓인 채'곡성'을 낼 수밖에 없
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화 말미에 가서 확인되는 악마의 정체성과 더불어 의심과 의혹의 미끼로 다가오는 악마의 실체화 과정이다. 영화는 갈수록 악마를 실체화하면서 신을 향한 신앙이나 행복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악마를 향한 의혹과 불행에 대한 의심을 동력으로 삼고 있다.

이는 햇볕이 만든 짙은 그림자만 쳐다보되, 그 위에 있는 햇볕은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의 실존적 현실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누구나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산다. 그러나 한국 영화속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양상은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는 인간이 아니라 발 딛고 있는 땅의 그림자를 주목한다.
이러한 현상은 본질보다는 실존이, 따스한 햇볕보다는 회한에 찬 곡성이 더 절절하기 때문일까? 영화 '곡성'은 상상과 현실을 오버랩시켜 영화적 몽타쥬로 만들면서 종교적 몽타쥬가 오버랩시키는 현실과 상상의 몽타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다시금 되묻게 한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종교문화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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