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 칼럼] 최고의 인테리어는 비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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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 칼럼] 최고의 인테리어는 비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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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8.30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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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철 교무(미주서부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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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예찬한 격언들은 한이 없고, 지금도 여전히 독서는 인격의 수양과 세속적 성공을 위한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의 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은 '책 좀 덜 읽자'는 말을 하려고 한다.

영산선학대학교 시절, 매 학기 초가 되면 방별로 청소상태와 정리정돈 상태 등을 점검하는 환경심사 같은 것이 있었다. 짧게는 2년에서 길게는 4년까지 지내야 하고, 명색이 대학생들이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지간한 수용품들은 대체로 구비해 놓고 지내는 편이었고, 안목이라도 좀 있는 친구들은 제법 근사한 인테리어 소품들을 멋스럽게 비치해 놓기도 했다. 하지만 내용물이 많을수록 단정한 느낌을 내기란 쉽지 않다. 내가 속한 방은 늘 1, 2등을 했다. 멋지고 세련된 장식물이 많거나 특별히 청소를 잘해서가 아니다. 책 10여 권, 옷 대여섯 벌, 양말과 속옷 약간…. 공식 행사 때 입어야 하는 정복(양복, 한 복)과 생활복, 작업복, 체육복 등 기본적인 옷만 해도 대여섯 벌은 족히 되 었음을 감안한다면, 나름 '심플한'편 이었다. 불법이 뭔지 잘 모르던 때였지만, 왠지 출가자는 수용품을 간소하게 해야할 것 같아 나름 노력했던 탓이다. '최고의 인테리어는 비우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깨끗하고 단정해 보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지혜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라고 본다면, 지혜는 수행의 목적, 지식은 지혜를 얻기 위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지식은 멋스런 방을 만들기 위한 인테리어 소품들처럼, 지혜를 얻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임에 틀림없지만, 일정 양을 넘으면 오히려 지혜를 어둡게 할 뿐이다. 원불교법을 전하는데 참고하기 위해 불교를 비롯한 타종교 서적을 읽기도 하고, 글쓰기에 도움이 될만한 좋은 글 들을 찾아 읽고는 있지만, 이러한 독서가 지혜를 밝히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처럼 독서를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도 문제지만, 매주 2~3권씩 책을 구입해 읽는 친구들을 보거나, 두 살 때부터 독서교육을 시킨다는 기사 등을 접하면 걱정을 넘어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최소한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 학문은 교화의 방편상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정산종사님께서도 학자불교를 언급하셨지만, 일정양을 넘어서면 지저분해 보이기 십상인 멋지고 근사한 인테리어 소품들처럼,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정보중심의 사고는 논리중심의 창조적 사고를 저해할 소지가 다분하다.

“학문에 빠지면 박식(博識)은 될지언정 정신 기운은 오히려 약해져서 참지혜를 얻기가 어려울 것이니” 대종사 님께서도 과도한 지식의 폐해를 경계하셨다. '세 번 이상 생각하면 망념'이 라거나 '철학자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불가의 속설을, 합리나 이성보다 믿음과 권위에 의존했던 과거시대 의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리지 못하는 이유이다.

주문은 뜻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정산종사님 말씀이나, 남방불교의 주된 수행법인 경전 암송 등도 과학(학문) 만능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 인들이, 경전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해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독서의 기능은 사고의 자료를 얻는데 한정되어야 하고 지식을 넓히기보 다 사고를 깊이 하기에 힘써야한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인테리어가 비우는 데 있다고 한다면, 모름지기 최고의 지혜 역시 비우는데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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