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은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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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은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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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8.3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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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작가의 ‘인문학으로 대종경 읽기’ 14-02 l 정법현 교도(북일교당)

인문학으로 대종경 읽기 14-02(삽입용).jpg

소태산은 일원상을 발명하지 않고 발견했다. 없는 것을 창조하지도 않았다. 칸딘스키가 추상으로서의 절대주의를 형상화한 것도 또한 창조라기보다는 발견에 가까웠다. 소태산과 칸딘스키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형상화에 대해 끝없이 고뇌했고, 마침내 일원상을 발견했고 그려냈다.
발견이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보는 것'을 말한다. 고은의 시, <순간의 꽃>처럼 말이다.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의 그 꽃은 창조된 꽃이 아니라 '거기에 있던'꽃이다. 꽃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 꽃을 올라갈 때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내려올 때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찰나의 발견인 것이다. 찰나의 발견을 통해 진리의 절대성에 즉, 법(法)에 도달하는 사람을 일러 우리는 성자라 부른다. 성자는 발견을 통해 대각하고, 대각을 통해 개벽하는 존재를 일컫는다.
성자의 발견은 끝없이 확장되어 돈오에 이른다. 여기에는 시간의 순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에 동시적으로 하나의 사물에서 만물로 발견의 확장이 이뤄지는 것이다. 발견의 확장을 찰나에 이뤄내는 사람은 성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끝없이 수행을 계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소태산이 발견한 일원상은 인류의 과학과 도학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모든 과학의 기본인 물리와 화학과 생물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가 동그라미이다. 그 동그라미가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인류는 사물의 첫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했다. 그 사유의 풍경을 옛 문헌에서 읽을 수 있다. 다음 글은 기대승이 태인에 살고 있는 일재 이항이라는 선비와 주고받은 편지의 일부이다.(태극도설(사진)의 그림과 대조하면서 읽으면 재미있습니다.)
이제 태극도 전체를 놓고 보면, 가장 위의 동그라미는 바로 이른바 태극입니다.

다음 아래 동그라미는“양은 움직이고 음은 고요하다(陽陰動靜)”는 것이며, 그 안에 작은 동그라미는 태극의 본체이니, 이것이 “음양에 나아가서 본체가 음양에 섞이지 않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하는 것입니다. 음의 고요함은 태극의 본체이니 그것을 서게 하는 까닭이요, 양의 움직임은 태극의 작용이니 그것이 가게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태극의 본체와 작용은 음양이 아닙니다. 다만 태극의 본체와 작용은 음양으로 말미암은 뒤에 보일 뿐입니다. 무릇 태극은 형상이 없고 음양은 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생기면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양은 변하고 음은 합하여 물(水) 불(火) 쇠(金) 나무(木) 흙(土)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오행은 각각 하나의 동그라미로 되어 있는데, 각각 하나의 성질을 가집니다. 각각 하나의 성질을 가진다는 것은 뒤섞인 태극의 전체가 오행의 하나하나에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래의 작은 동그라미는 무극이라는 것으로서 이오(二五), 즉 음양오행이 교묘하게 합쳐 뭉친 것입니다.
다음 동그라미는 “하늘의 도는 남자를 이루고(乾道成男) 땅의 도는 여자를 이룬다.(坤道成女)”는 것입니다. 기로 이루어진(氣化) 측면을 말하면 남녀가 각각 하나의 태극입니다.

맨 아래의 동그라미는 “만물이 이루어진다.(萬物化生)”는 것입니다. 형체로 이루어진(形化) 측면을 말하면 만물은 각각 하나의 태극입니다. 이것은 그 도상의 설명에 이미 분명하게 나와있지 않습니까? 그 이치를 묵묵히 새기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황, 기대승, 김영두 옮김, 「퇴계와 고봉 , 편지를 쓰다」, 소나무, 2003, 497~498쪽)
기대승은 주돈이(周敦)의 <태극도설>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기의 움직임이 어떻게 사물을 탄생시키는지 설명하고 있다. 과학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오랜 옛날에도 선조들은 만물의 본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했고 논쟁했다. 그 중심에 일원상이 있는 것이다. '태극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두 일원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 일원상이 아닌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태산은 일원을 만물의 본원이라고 했던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근원은 일원이라는 것이다.
소태산은 일원상을 어떤 대상이나 상징으로 지칭하지 않았다. 고정된 어떤 형체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동작도 아닌 진리의 체성으로써 일원상을 발견했고 그린 것이다. 체성이 있으면 작용이 뒤따른다. 소태산은 이것을 발견한 것이다.
원불교의 일원상은 유불선의 진리를 원융회통한 것은 물론이고 물리와 화학과 생물의 일반적인 과학의 원칙이 융복합된 만물의 본체 그 자체이다. 또한 우주만물처럼 생로병사와 성주괴공을 되풀이하고 있는, 살아 있는 법이요 진리로써 일원상인 것이다. 일원상은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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