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불一佛이 아닌 다불多佛을 말하다
상태바
일불一佛이 아닌 다불多佛을 말하다
  • 관리자
  • 승인 2016.09.05 05: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도상 작가의 ‘인문학으로 대종경 읽기’15-02 ㅣ 정법현 교도(북일교당)

크기변환_정도상작가.jpg

부처는 하나뿐인가? 법신불 비로자나불, 보신불 아미타불, 화신불 석가모니불은 삼신불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부처이다. 이 부처들을 달마는 앞부처라고 했다. 또한 달마는 앞부처 뒤에 따르는 부처를 뒷부처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에는 앞과 뒤가 없다. 모든 부처는 동시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유로 일원상에는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이 모두 연기되어 있다. 그래서 소태산은 우주만유로서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마음) 아님이 없다고 했다.

일원상은 마음이고 부처다. 일원상은 하나의 유일한 마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숫자만큼 많고 많다. 저마다 각자의 마음이 다르듯이 일원상의 형상이나 내역 또한 다르다. 각자의 마음이 다르듯이 부처 또한 모두 다르다. 하지만 다른 것이 다른 것만은 아니고, 같은 것이 같은 것만은 아니다. 장자의 말처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마음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고, 부처가 있으므로 마음이 있다. 기호로 구성된 단어의 모양은 모두 'ㅁ+ㅏ+ㅇ+ㅡ+ㅁ'이지만 문장 안에서 혹은 문맥 위에 놓여진 '마음'에는 다양한 층위와 내용이 각기 다르게 담겨 있다. 이집트의 헤르메스 트리스 메기토스가 쓴「에메랄드 타블렛
(Emerald Tablet)」에는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신비로운 힘, 사물을 조화롭게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힘의 세계에 대한 표현이 나온다.

“안에 있는 것은 밖에도 있고 큰 것이 곧 작은 것이다. 위에 있는 것이 아래에도 있으니 오직 존재하는 것은 한 생명과 한 이치다. 이것을 움직이는 자 또한 그와 하나이다. 신성한 경계에는 안도 없고 밖도 없다.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 위와 아래 또한 없는 것이다(김융희 지음,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 책세상, 2000년, 86쪽)”

우주 만물의 조화와 상응 원리가 시적인 문장 안에 집약되어 형상화되어있는 글이다. 마음의 세계 또한 이와 같지 않은가. 물질계 즉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형상은 그 내부에 비밀을 담고 있고, 그것들은 상징적인 방법으로 서로 연기되어 있고 소통한다. 마음과 일원상의 원리도 저와 같다. 불상은 부처가 아니다. 부처를 인격적으로 형상화한 조각물이다. 불상은 부처의 관념이 겉으로 드러나도록 조각하고, 금칠을 하고, 수염과 눈동자를 그려 넣고, 손가락 모양을 만들어낸, 부처의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달마에 의하면 부처는 마음에 있으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고, 불상 숭배의 기복 종교로 전락해가는 불교를 개벽하기 위하여 달마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것이었다. 그리고 선종(禪宗)을 열어 마음공부를 하라고 가르쳤다. 소태산은「대종경」곳곳에서 다불사상(多佛思想)을 말했다. 집집마다 부처가 살고, 며느리가 부처고, 들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 산업부원이 모두 부처라고 했다. 농촌에 가면 가장 흔히 보는 사람들이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은 땡볕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밭일을 한다. 식전 댓바람부터 마당 가득 달빛이 드리울 때까지 하루 종일 잠시도 몸을 놀리지 않는다. 밭으로 쳐들어오는 온갖 바랭이들을 뽑아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어느 순간 일을 하는 몸만 남고 마음이 텅 비게 된다.

그 찰나가 바로 부처가 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할머니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부처가 되었다가 중생이 된다. 할머니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노동을 하면서 무념무상의 선에 빠지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부처와 중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이렇듯 소태산은 부처를 관념(觀念)이 아니라 구체(具體)로 인식했다.

소태산은 일원상의 신앙도 관념적이지 않고 생활 속에서 구체적이기를 원했다. '언제 어디서나 불상을 숭배하지 말고 부처가 되고자 하며 무슨 일을 하든 가지려 하지 말고 주려고 하라'는 것이다. 은혜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