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생사관生死觀의 이해와 공도자숭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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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생사관生死觀의 이해와 공도자숭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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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9.05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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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교당 영모전 입묘기념 특별기고 ㅣ 최도운 교무(재정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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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그런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를 꿈꾼다. 이는 흩어지는 기를 중지시키려는 것과 같다. 무위자연에의 견지에서 보면 이는 역행이며 세월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도를 거슬리는 행위에 따라 고통은 맞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이러한 고통은 도를 깨닫지 못하거나 거역함에 온 것이다. 장수를 위한 인위적 생명의 연장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으며 자연의 변화에 생을 맡은 채 시냇물처럼 물 흐르듯 살아가면 죽음을 맞이할 때 고통이 없지만 거스르면 고통이 따르고 마침내 죽음을 당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항상 흐르는 시냇물처럼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시시각각 옮겨 변하기 때문에 세상과 명(命)에 집착할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 사이에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관된 불가사의의 법칙 곧 인연이 있어서 일체가 성립되는 것이라 보았다. 이는 무연자연을 강조하는 도교의 생사관이다. 인간이 생사를 중시하는 이유는 누구나
이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필연 속에 있기 때문이다.


# 원불교의 생사관
“보통 사람들은 현세에 사는 것만 큰 일로 알지마는, 지각이 열린 사람들은 죽는 일도 크게 아나니, 그 이유는 잘 죽는 사람이라야 잘 나서 잘 살 수 있으며, 잘 나서 잘 사는 사람이라야 잘 죽을 수 있다는 내역과, 생은 사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라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니라.(대산4집)” 달리 이야기 하면 생과 사는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 잘 살 수있다는 것은 잘 죽을 수 있다는 것이며 생과 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하기에 생사대사(生死大事)라 한 것이다.

생은 자연의 이법대로 지은대로 태어나게 된다. 태어나서는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 그래서 잘 살아야 하고 잘 죽고, 잘 죽어야 잘 낳게 된다. 낳을 때는 자기 맘대로 못 태어나니 살아갈 때 잘 살아서 잘 죽는 것이 잘 태어나는 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 애착, 탐착, 원착을 놓고 청정한 마음으로 잘 죽는 일이 큰일이다. 대종사는 그 큰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었으니 늘 청정심을 챙겨 살아야 그 마음이 최후의 일념이 되는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죽음이 곧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죽음이란 또 다른 하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인 변화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는 죽음이 마지막으로 보이겠지만 영혼이나 영식의 개념으로 보면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열반에 들면 장례라는 의식을 하게 된다. 장례는 열반자의 영혼을 새로운 곳으로 옮기고, 그 가족, 친족들이 새로운 변화의 체제에 적응하기 위하여 행해지는 것이다.

죽음을 해결하는 방법은 해탈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보았다. 애착 탐착을 놓고 청정한 마음과 큰 서원으로 중생계를 벗어나 불보살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성품의 본래 자리에는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사가 돌고 도는 것을 사시순환, 주야변천, 눈의 뜨고 감음, 숨의 들이쉼과 내쉼 등으로 밝혔다. 돌고 돈다는 것은 가는 것이 곧 오는 것으로 불생불멸이며 돌고 돈다는 것은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므로 인과보응이다.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은 일원상의 돌고 도는 진리에서 일치하는 것이다.


# 나오는 말
시대와 사상에 따라 각기 다른 생사관을 가지고 있고 그 믿음에 맞추어 삶과 죽음을 재해석 하곤 했다. 유교에서 죽음은 영원한 이별의 슬픔이지만 이별한 대상이 다른 세상으로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고 생자(生者)와 함께 관계를 지속하며, 영혼의 불멸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 불교의 세계관은 힌두교와 유사한 순환론적 윤회 전생설을 가지고 있으며 도교는 장생불사를 꿈꾸지만 결국은 무위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시냇물의 물 흐름으로 죽음을 비유한다.

원불교의 생사관은 유불도의 사상이 들어있으며 그 중심에는 생사일여(生死一如)사상이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고 삶과 죽음을 나누어 생각하지 않고 하나로 보았으며 애착 탐착 원착을 놓고 청정일념과 서원으로 해탈을 하면 중생의 육도윤회가 아니라 불보살의 생사거래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생불멸과 인과보응 곧 일원상 진리 속에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이 된다.

2014년 유럽 6개국 장묘시설 연수 때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위치한 작은 나라 리히텐슈타인의 파두즈 묘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이 묘지가 위치한 곳은 이 나라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볕이 잘 드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명당의 조건과 성스러움의 장소에 조상과 가족을 모시는 곳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자곡동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강남교당이다. 5층에 자리한 영모전은 90평 규모로 고인의 위패를 모시고 숭덕존공과 추원보본의 사상 그리고 효줄을 이어간다. 교당에서 가장 밝고 풍광이 좋으며 대모산의 정기를 온통 받을 수 있는 명당중의 명당이어서 고인을 추모하기에 더 이상의 장소는 없는 듯 했다.

고인의 위패를 성소(聖所)에 모시고 역사와 영상을 보관하여 길이 기념하는 것은 곧 공도자숭배이며 대세계주의 사상이 될 것이다. 세계에서 공도자숭배를 극진히 하면 세계를 위하는 공도자가 많이 나듯 우리도 세계나 국가나 사회나 교단을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공헌한 사람들을 그 공적에 따라 자녀가 부모에게 하는 도리로써 숭배하면 자연히 그 공도정신을 체받게 되며 공도에 헌신하는 공도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도자숭배 사상이 각 교당의 영모전을 통해 전 세계로 이어진다면 대세계의 사당이 되고 대종사께서 말씀하신 광대무량한 낙원세계가 건설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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