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 칼럼] ‘성지’와 ‘성지수호’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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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 칼럼] ‘성지’와 ‘성지수호’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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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9.29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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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원 교무(오수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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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성지 수호에 관한 대처에 대하여 아쉬운 점과 답답한 점을 말하자면 수백 가지도 넘을 것이다. 사드 설치장소가 성주성지에 유력하게 되면서 교단은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한마디로 그 전까지는 몇몇 출가·재가들만의 관심사였지, 교단과는 별개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주성지에 교당이나 토지, 시설물이 설치됐을 경우에도 교단의 큰 문젯거리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포함된다.
교단이 직접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성지라는 개념이 작동하게 된 것이다. 즉, 교당이나, 토지, 시설물은 요샛말로 시원하게 국가의 안보상 양도하고 보상금이나 받고 끝날 문제인데, 한 종교의 성지라는 거대한 상징이 있으니, 이를 처리하는데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현시점에 교단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우왕좌왕이었다. 그 중에 가장 아쉽고 답답한 점은 출가와 재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고충과 사고를 같이하는 노력이 매우 미흡했다는 것이다. 특히, 교화현장에서 교도들을 만나는 입장에서 방향을 정하고 홍보자료를 담보하지 못한 것은 매우 큰 실기라고 본다.
'성지'라는 명칭 사용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차지하고라도 우리 원불교인들에게 반드시 물어야 할 개념이 있다. 바로'성지'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필자도 성주가 '성지'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이번 교단의 대처에 지지를 표하거나 행동을 같이하는 것에 가볍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지'는 다르다. 한 종교에서 창시자, 교리, 신앙의 대상 그리고 성지는 분명히 다르게 접근하고 풀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특히 성주의 경우는 지난 영산성지와 부안의 핵폐기장 반대투쟁 때 보다 더 심각하게 성지 공간이 직접 편입되기에 더욱 다르다.
성주를 성지라고 규정한다면 필자는 사드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이 들어올지라도 성지를 수호해야 한다고 외칠 것이다. 이는 국가뿐 아니라 여타의 외부단체나 조직에게 똑같이 해당 되는 것이다. 성지는 거래나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처럼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전 앞에 종교가 우선할 수 없다. 틀린 말은 아니다, 틀린 논리도 아니다. 그러나 이는 종교, 종교의 교리, 성지라는 개념까지 함께 생각해야 할 문제를 간과한 것이다. 성지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먼 훗날 다시 찾으면 될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풀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성지수호를 위한 몸부림이나 최소한의 방어조차 포기하는 것이기에 매우 위험한 논리와 행위가 된다.

성지는 국가로부터 거래와 흥정의 대상이 될 상태에 놓일 수 있다. 또한 다른 이익집단으로부터도 거래와 흥정이 될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특히 원불교는 세력도 약하고, 힘도 없으니 더욱 더 그럴 위기에 놓일 수 있다. 필자는 유독 성주가 원불교의 성지라는 사실만을 고집하지 않겠다. 이웃 종교의 성지도 또한 그렇게 우리는 대해야 한다.

만에 하나 역사에서 원불교가 역사에서 사라질 지라도 문자와 기록 속에 성주성지는 영원히 존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많은 출가·재가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권리를 위해 스스로 투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권리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의 권리를 그 누군가(정부, 시민단체, 양심 있는 시민)가 대신 싸워주고 획득해 줄 것 같지만, 그것은 큰 오판이다. 권리는 자신이 당당히 주장할 때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때, 나는 그저 잠을 자지 못하며 진도 앞바다에 가보지도 못하였고 이불속에서 울기만 했다. 국정교과서 사태 때도, 나는 분노만 하면서 투덜거리기만 했지 무엇 하나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성지수호를 말하며 글 쓰는 모습이 참 처연하고 불쌍하고 못났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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