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이 짚신신고 법당 밖으로 나오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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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이 짚신신고 법당 밖으로 나오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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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9.29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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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교사스페셜 ㅣ 박청천 교무(교화훈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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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장사 삭발 - 진승하산(眞僧下山) 가승입산(假僧入山)

소태산은 백학명의 요청에 의해 내장사에서 재가 · 출가 합작하여 불교 중흥사업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산중 승려의 반대로 무산되고, 대종사는 내장사에서 삭발하고 하산한다.

김제에서 면장을 지낸 송상면이 대종사의 제자가 되고 만경(萬京)이란 법호를 받았다. 불법연구회 입회원명부에 음력 정월보름이 입문일자다. 대종사는 삭발하고 전주를 경유 서울에 가서 박사시화, 이동진화, 이공주를 제자로 맞는다. 소태산의 삭발일자는 1924년 2월 19일이다.
일찍이 진묵대사께서 “진승(眞僧)은 하산(下山)하고 가승(假僧)은 입산(入山)한다”예언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갓 쓴 불상을 조성하였거니와 이를 미륵불이라 하였다.
소태산은 진묵의 예언대로 내장사에서 삭발하고 하산하여 서울로 갔고 비산비야(非山非野) 익산에서 회상을 열었다.

8. 미륵이 짚신신고 법당 밖에 나왔다.
국보 62호 금산사 미륵전 대종사 퍼포먼스는 원기9년 6월 1일 이리 보광사(普光寺) 창립총회에서 그 해답이 나온다. 이리역 근방 마동 비산비야 새 절 마당에 미륵이 짚신 신고 우뚝 서 있다. 마당에 선 미륵불이 향한 곳은 높은 뫼 너머 신룡벌이고, 미륵산 아래 황등 호숫가에 신룡벌이 있다.
보광사는 후천개벽의 기념비적 사적이다.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하기 4년전에 지은 작은 절이다. 1920년에 김성천 화상(和尙)이 창건하였다.

대종사께서 금산사에 다녀온 직후부터 짓기 시작했다. 미륵이 금산사 미륵전에서 나와 솝리 보광사까지 걸어오느라 4년이 걸렸다. 고생해서 그런지 키도 사람 크기로 줄어들었고 피부도 검게 그을렸다. 일하는 부처님의 면모다.
보광사는 대종사를 위하여 준비된 절 같다. 그 제자들인 우리들이 보광사를 92년 간 방치하였다. 1987년만 해도 보광사는 초파일이 되어도 등 달려오는 신도가 얼마 안 되는 가난한 절이었다. 주변 땅까지 모두 천 평이 되는데 내놓아도 팔리지 않았다.
이를 확보하는 문제는 최우선 과제로 해결해야 하는데 시기를 놓쳤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나 문제를 확실히 알았을 때 문제해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미륵은 수천 년 동안 법당에 갇혀 나오지 못하였다. 그동안 일어서 섬마섬마 걸음마를 배웠으니 법당에 나오려면 신을 신어야 한다. 대종사께서 신을 마련하였고 데리고 나와 이리역 근방 죽산 보광사까지 왔다.
대각이란 나 하나에 국한되어 있던 의식이 툭 터져서 우주의식으로 확대되고 무한히 기뻐 세상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은 단수가 아니라 무량수다. 대각이란 민중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다. 세상 구제 사명감이 불타는 부처가 미륵이다.
오늘날 원불교 재가·출가 교도들, 삼학 솥의 무량수 훈련 도량을 운영할 경륜을 가진 우리들의 역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보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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