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은과 정의 그리고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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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은과 정의 그리고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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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0.27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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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튼교무의 정전산책 (80) ㅣ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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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은에서 「법률」은 '인도 정의의 공정한 법칙'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법률'은 정의의 공정한 법칙을 따르는 것으로, 대종사님은 “정의(正義)란 자리이타가 화(化)하는 법”(「월말통신」11호)이라 하셨습니다. 강자와 약자 간에 공정하게 자리이타(自利利他)되는 것입니다.

# 정의와 분배
정의는 분배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따라 공정성의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란 강자의 논리라는 주장에 대해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주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기여한 정도에 따라 몫을 나누는 것이 정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론은 기여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양한 변수가 발생되어 기준잡기가 무척 어렵게 됩니다.
벤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를 주장합니다. 벤덤은 인간이란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선택하는 존재로, 쾌락에 대한 욕구와 더불어 고통에 대한 혐오를 가지는 것이 인간의 보편성이기에, 인간사회는 제한된 자원을 나눌 때 쾌락의 양을 극대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도덕과 입법의 원리서설」) 그러나 이러한 벤덤의 정의론에는 소수자의 희생이 발생하게 됩니다. 최대다수라는 공리(公利)를 위해 소수의 희생과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전제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고통에 대해 혐오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고통의 양이 증가되는 상황이 됩니다. 결국 다수라는 강자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분배의 정의에 대해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절차'를 통해 정의를 찾도록 유도하는 '절차적 정의'를 주장합니다. 이를 '무지의 베일' 정의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자기의 처지를 알 수 없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의사결정자에게 결정권을 마음대로 주되 자기가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도록 무지(無知)의 베일을 씌우는 것입니다. 이를 원초적 입장이라 합니다.
만일 세 사람이 케이크를 나눌 경우 어떻게 나눌 것이냐는 것입니다. 롤스는 이러한 경우에 무지의 베일을 쓰도록 합니다. 이러할 경우 내게 가장 위험부담이 클 경우(가장 적게 먹게 될 경우)를 전제하여 그 위험부담이 최소화 되도록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여 엄청난 나락에 떨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가장 밑바닥의 상황에 닥치는 최소 수혜자일 상황을 선택지로 삼는 것입니다. 최소 수혜자의 이익이 최대화되도록 하는 원칙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롤스는 인간의 이기적 욕심에 근거하여 선한 의지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 윤회와 정의
무지의 베일의 다른 표현은 윤회와 인과일 것입니다. 윤회의 과정 속에서는 어떤 인과를 받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변하여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인과윤회의 베일'입니다. 일생만이 아니라 삼세를 윤회하기 때문에 이 기세간을 약자가 살 수 있는 사회적 약자가 보호받는 국토로 만들어 놓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윤회를 받을지 모르고 또 어떠한 인과보응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사회적 조건을 약자가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결국은 자신에게 도움이 됩니다.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는 업에 대해서 서로 해독이 아니라 은혜로 갚게 되는 환경을 조성해 놓으면 결국 어떠한 윤회의 조건 속에서도 주고받는 인과를 상생선연으로 풀어가는 것이 됩니다.

혹시 내가 성차별이 있는 가정에 태어나더라도 남녀차별이 없는 세상을, 혹시 내가 무산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다할지라도 집 없는 고통에 힘겨워하지 않는 세상을, 혹시 내가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교육차별 등의 차별이 없는 세상을 견지할 때, 즉 사회적 약자를 고려할 때, 소수자를 배려하는 환경을 조성할 때, 분배의 정의는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는 윤회하기 때문에 더욱 약자를 배려하는 진화된 사회를 구축해야 할 것 입니다.
정의와 법의 관계에 있어서 법은 정의에 가장 가깝게 입법(立法)되고 치법(治法)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대종사님의 말씀처럼 강자와 약자가 다 자리이타로 화(化)하게 하여 영원한 강자로 진화시키는 것이 결국 정의의 원칙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지각 있는 사람은 남이 궁할 때에 더 도와주고 약할 때에 더 보살펴 주어서 영원히 자기의 강을 보전할 것입니다.(대종경 인도품 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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