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보는 세 가지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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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보는 세 가지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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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1.25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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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 작가의 ‘인문학으로 대종경 읽기’ 17-1 ㅣ 정법현 교도(북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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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은 일원의 진리를 공(空)과 원(圓)과 정(正)으로 요약했다. 소태산이 설명한 공과 원과 정의 요약은 참으로 짧고 간단하다. 하지만 짧고 간단한 요약 속에 원불교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공과 원과 정을 일원진리의 '삼요소'라고 생각한다. 소태산은 이 삼요소를 양성과 견성과 솔성의 삼관점으로 나누어 설명하여 조금이라도 쉽게 진리(法)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러나 워낙에 축약이 심하기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깊이에 가 닿기가 참으로 어렵다.
일원진리의 삼요소가 무엇인지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관점의 개념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태산은 양성, 견성, 솔성의 순서로 삼관점을 설명했지만 순서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임의적으로 삼관점의 순서를 견성, 양성, 솔성으로 조정하는 것은「대학大學」의 팔조목 순서에 맞추기 위해서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로 이어지는 대학의 팔조목은 인지(認知)의 일반적인 과정과 매우 흡사하게 구성되어 있다. <대학>의 팔조목은 물질개벽에서 정신개벽으로 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팔조목을 통해 물질의 본체와 작용을 알지 못한다면, 물질의 개벽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것이다. 물질개벽을 모르고 정신개벽으로 나갈 수는 없다.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은 <대학>의 삼강령인데, 정신개벽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물질의 본체와 작용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물질이 개벽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인식할 수 없다. 물질개벽을 모르고서야 어찌 정신개벽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백낙청은 원불교가 정신개벽만 강조한 나머지 물질개벽에 대해서는 허투루 여기고 지나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물질개벽을 도외시하고 정신개벽만 중시하는 것은 “현하”를 외면하는 것이다. 원불교는'현하의 종교'인데 현하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칫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 추구하는 경향으로 흐르지 않을까 우려한다. 마음의 껍데기만 공부하는 것은 마음공부를 하지 않는 것보다 못 하다.
현하는 '지금 이 순간의 어떤 상태 혹은 상황'이다. 일원진리는 절대성으로 우뚝 존재(Being)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어떤 상태 혹은 상황'으로 존재(becoming)하는 것이다. 소태산은 그것을 누누이 가르치고자 원불교의 교전의 맨 처음 단어로 “현하”를 선택했다.
소태산이 제시한 진리를 보고 기르고 따르는 세 가지 관점은 견성, 양성, 솔성이다. 원불교에서는 견성을 사리연구며 양성을 정신수양이고 솔성을 작업취
사의 영역으로 분류했지만 꼭 그렇게 분류되는 것만도 아니다.견성이란“보다”이다. 그냥 아무 것이나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질문을 보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산다는것은 무엇인가?” “저것은 무엇인가?” 등등의 질문을 보는 것이 견성이다. 질문 자체가 이미 성품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견성은 그러나 아름답거나 고 아한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불안하고 불온한 흔들림이 견성에는 담겨 있다. 보는 것이 곧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 어떠한 대답도 무가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의 적나라함으로 귀결된다.”(폴 리쾨르, 김웅권 옮김,「자기와 이야기적 동일성」,「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동문선, 2006년, 225쪽)
적나라하다는 것은 내부의 부끄러움까지도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늘 불안하고 동시에 불온하다. '나'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누군가가 내 울타리를 부수면서 들어오는 것과 같은 위협의 느낌이 담겨 있다.
“나”라는 울타리가 부서지는 것을 확연히 느끼면서도 그것을 외면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견성이란' 나의 위선'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일원진리를 보는 첫 번째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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