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도단의 지혜, 일원지一圓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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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도단의 지혜, 일원지一圓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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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1.23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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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작가의 ‘인문학으로 대종경 읽기 ’17-5 ㅣ 정법현 교도(북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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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진리의 삼요소인 공(空)과 원(圓)과 정(正)은 서로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개별적으로 분리된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동시적으로 연기(緣起)되어 있다. 서구식 표현을 빌리자면 변증법적으로 관계 맺고 있다. 장자는 연기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고 표현했다. 즉,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는 것이다. 용수는「중론中論」에서 '중도'란 '공'이며 '연기'라고 말했다. 삶의 모든 요소는 서로 연결되어 어울려 있으며(緣起), 연결이 끊긴 개별적인 삶이란 없다(空)는 것이 용수의 말이다. 어느 하나가 결핍되면, 다른 것들은 제대로 생성되지 않고 어긋나거나 어그러지게 된다. 공이 결핍되면 원과 정은 어그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공이 없으면 원과 정이 없고 원이 없으면 공과 정이 없으며 정이 없으면 공과 원이 없다. 반면에 공이 있어야 원과 정이 있고 원이 있어야 공과 정이 있으며 정이 있어야 공과 원이 있다.
공과 원과 정은 언어적 개념이 아니다. 대종경에 나타난 소태산의 말씀에는 언어 자체의 표현력과 분별력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 소태산은 박사학위를 받은 종교학자가 아니다. 책이나 문장을 통해, 요즘 말로 텍스트를 통해 깨닫지 아니하고 오직 몸의 격투를 통해 '만유가 한 체성이고 만법이 한 근원'인 것을 깨달은 성자다. 그러기에 소태산의 언어는 분별지의 언어가 아니라 반야지의언어다. 반야지의 언어는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체득된 언어다. 언어를 체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체득한 뒤에 창조된 언어가 바로 반야지의 언어다. 소태산의 말씀을 분별지의 언어로 알고 학술적으로만 접근하면 곤란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불가의 반야지(般若智)를 원불교적으로 바꾸면 일원지(一圓智)라고 할 수 있다. 소태산의 말씀은 일원지의 언어다. 일원지의 언어는 언어에 의해 표현되고 있지만 언어 자체의 뜻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일원지의 언어에는 언어를 초월한 삶의 확장성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공부'라고 했을 때, '마음'이라는 단어를 공부하자는 게 아니다. '마음'과 관련된 동서양의 온갖 문헌들과 서지(書誌)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음공부라고 했을 때의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언어적 개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일원지로 확장되진 않는다. '마음공부란 삶의 순간순간마다 경계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화무쌍한 마음의 결을 하나하나 촘촘하게 들여다보고 챙기고, 칠정에 사로잡혀 절망하는 그 마음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태산이 말한 공과 원과 정은 일원지의 언어로 그 뜻을 언어로 해설할 수가 없다. 언어의 허구(虛構)로 삶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일원상서원문은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로 시작한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은 “언어도단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에서 나오는 말로 절대적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할 때 쓰이는데, 궁극의 진리는 언어의 길이 끊어진 경지라는 뜻이다. 말이나 글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깨달음의 깊이와 넓이를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뜻인 것이다. 이어 심행처멸(心行處滅)은 마음의 작용이 미치지 못하는 마음의 본체(本體心)라는 뜻으로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끊어진 경계를 뜻한다.
원불교의 대종경은 소태산의 일원지가 펼쳐진 경전이다. 쉬운 언어로 표현되어 있어, 처음 읽는 사람은 “에게, 이게 무슨 경전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성경이나 불경에 비해 수준이 낮다고 실망할 수도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중국어 불경과 식민지시대에 번역된 문어투 성경을 사대주의적으로 경배해왔다. 그러니 원불교의 대종경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 속에는 유럽중심주의와 중국과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정치 문화 사회 경제 전 영역에 걸쳐 폭 넓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지식적 식민지 상태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소태산은 공과 원과 정을 문자로 고착된 개념이 아니라 삶의 매순간마다 새롭게 작용하는 스스로 확장되고 창조되는 진리로 대중 앞에 내놓았다. 우리는 언어로서의 공과 원과 정을 배우는 게 아니라 불립문자로서의 공과 원과 정을 삶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소태산이 교의품 7장을 대종경에 두렷하게 남긴 뜻을 조금이라도 받드는 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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