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개벽 시대의 공부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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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개벽 시대의 공부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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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2.1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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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 작가의 ‘인문학으로 대종경 읽기’ (18) ㅣ 정법현 교도(북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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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할 때 '진리'라는 단어와 마주하게 되면 살짝 주눅이 든다. 진리는 나와 아주 거리가 먼 곳에 있는 '어떤 것'이거나 성자들이 창조해 낸 '위대한 어떤 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리는 언제나 없는데(眞空) 있다고(妙有)하는 그 '어떤'것이었다. 손에 잡히지 않고 애매하고 모호한 정체를 가진 진리. 사바세계의 애욕에 찌든 삶에서 보면 진리는 너무 깨끗하고 반듯해서 도무지 가까이 갈 수 없는 '그 어떤 것'이었다. 게다가 진리를 드러내는 말들은 언제나너무 어려웠다.

그리스어로 진리는 '알레테이아(aletheia)'이다. '레테의 강'과 연관이 있다. 레테의 강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 흐르는 강이다. 망자들이 이 강을 건너면서 강물을 마시게 되면 전생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레테(lethe)에는 '망각과 은폐 그리고 상실'의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에 접두사 'a'가 붙은 단어가알레테이아인것이다. 'a'는 '벗어나다, 탈, 결여, 부정'의 기능을 수행하는 접두사다. 영어의 'post'와 같은 뜻과 기능을 갖고 있다.

레테의 강을 떠난 '알레테이아(진리)'는 '은폐되지 않은 것, 드러나 있는 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진리는 명백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진리는 점점 더 '어려움의 길'로 가게 되었다. 그 길로 진리를 끌고 간 사람들은 성자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이었다. 철학자들은 진리를 철학의 깊은 동굴로 끌고 들어갔다. 그들 스스로 철학을 쇠(鐵)처럼 단단하고 녹슬고 완강한 그 무엇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야말로 녹슨 철학(鐵學)이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진리를 생활 밖으로 끌고 나가 '낯설고 어려운 문자'로 정착시켰다. 이제 진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그 '낯설고 어려운 문자'를 공부하느라 생애 전체를 바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리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칸트를 공부하느라 생애를 낭비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진리는 문자와 텍스트를 통해 오는 게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소태산은 서울대 철학과 박사도 하버드대 종교학 박사도 아니다. 소태산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도 아닌 겨우 '서당 중퇴'이다. '서당 중퇴'학력이 전부인 소태산은 실생활에 적용하지 못하는 진리는 '쓸 데 없는'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실생활이란 무엇인가? 소태산은 실생활을 고정된 일상의 생활로만 보지 않았다. 자주 강조하는 바이지만 소태산은 원불교를 '현하의 종교'로 열었다. 현하는 '지금 여기'라는 뜻이다. 각 개인이 지금 여기에서 처한 삶의 상태가 바로 현하이며 민족이나 종족의 공동체는 물론이고 인류 전체가 지금 여기에서 처한 삶의 패러다임이 바로 현하이다. 소태산의 실생활은 언제나 현하의 실생활인 것이다. 그러기에 고정된 삶이 아니라 무쌍하게 변화하는 역동적인 삶이 바로 소태산의 실생활인 것이다. 진리와 실생활의 현하적 관계에 대해 백낙청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 서양사람들이 생각하던 진리라는 것도 도가 드러나는 하나의 모습으로 시작을 했는데, 이제는 그야말로 물질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운용할 수 있는가라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변한 '진리'를 바로 '정보'라고 표현하면서 그런 정보를 가지고 매사를 움직여 나간다는 뜻이라면, 그건 전혀 다른 이야깁니다. … 실제로 지금 정보사회라고 할 때 그 정보라는 것은 참된 지혜나 참된 앎과는 거리가 멉니다. 컴퓨터로 입력이 안 되는 것은 정보사회에서 활용이 안 됩니다. 가령 이론상의 진리가 컴퓨터에 넣으니까 안 들어간다면 그것은 정보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따라서 이 사회를 움직여 가는 원리로서, 힘으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얘기인데,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정보사회야말로 물질개벽이 극에 달한 사회이고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되는 현상이 더없이 심각해진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의 발달이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개벽이기 때문에, 그래서 심지어는 종전에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던 정신적인 가치들마저도 물질개벽의 대상이 돼서 그야말로 깨져버리는 시대이기 때문에, 종래의 정신적인 가르침 가지고는 이 현실에 대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백낙청 지음, 박윤철 엮음,「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백낙청의 원불교 공부」,「 물질개벽 시대의 공부길」, 모시는 사람들, 2016년 12월, 47쪽)”

나에게 원불교를 현하의 종교로 가르침을 준 사람은 백낙청이다. 원불교에 입교하고 오래지 않아 인사를 드리려고 만났을 때, 교전의 첫 단어가 '현하'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그 때의 떨림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 백낙청에게 현하는 물질개벽이 극에 달한 상태이다. 그 현하의 실생활에 진리를 적용하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렵다고 포기할 수 없는 공부가 있고, 가시밭길이어도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있다. 그 길이 바로 물질개벽 시대의 공부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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