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 오피니언] 정교동심(政敎同心)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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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 오피니언] 정교동심(政敎同心)을 생각하다
  • 관리자
  • 승인 2017.02.25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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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 오피니언

한울안오피니언(원익선).jpg

* 본 칼럼은 「경향신문」과 동시 개재됐습니다.

30년 전 냉전기에 미국과 소련 간의 가상 핵전쟁을 그린 미국 ABC방송의 TV영화인 '그날 이후(The Day After)'를 보며 전율이 일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핵탄두가 들판과 도시 위를 날아가는 장면은 일반 영화에서 보는 그것과 차이가 없었지만, 불타버린 교회 지붕 아래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에서는 종교의 한없는 무력감을 보았다.
인간은 결국 자신을 집단자살로 몰아 넣을 수 있는 정신분열에까지 이르렀음에 절망했다. 굳이 그 핵이 아니더라도 한반도는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불바다'가 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그 전선을 개성으로 올려놓기까지 반세기가 걸렸는데, 현 정부는 하루아침에 한국전쟁 당시의 마지노선이었던 낙동강 근처인 성주까지 내려놓았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 배치가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과 군산복합체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반영구적으로 가보지 못할 롯데성주골프장 맞은편의 산길을 지난해 가을 그 곳 대책위원회 주최로 함께 걸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원불교 2대 지도자인 정산 송규(1900~1962)가 가야산을 거쳐 전라도를 향해 걷던 구도의 길이었다.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 그리고 두껍게 쌓인 낙엽은 지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그 산 너머 북쪽 7㎞ 지점에는 김천혁신도시가 있었다.
차로 돌아오는 굽이진 산길에서 바라보는 만추의 붉은 단풍은 알프스의 평화로운 풍경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곳이 군사기지가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우리는 언제까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해야만 하는가 하는 자조 섞인 한숨이 새어나왔다. 자생적 한국 종교인 원불교 또한 이 회한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에 새기며 성장해왔다.
성주에 배치계획이 알려지자마자 대책위를 꾸리고 오늘도 엄동의 칼바람을 맞으며 “사드는 미국으로, 평화는 한국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반대집회를 벌이고 있다. 정의는 세우고 불의는 '죽기로써' 물리칠 것을 핵심 가르침으로 확립한 종교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모습이다.
정치와 종교가 한마음으로 조화를 이루어 민중의 고통을 해소해야 한다는 정교동심을 교의로 삼은 것도 원불교다. 송규야말로 이 점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다. 1945년 광복 직후에 「건국론」을 써서 새로운 국가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다. 그는 “정신으로써 근본을 삼고, 정치와 교육으로써 줄기를 삼고, 국방·건설·경제로써 가지와 잎을 삼고, 진화의 도로써 그 결과를 얻어서 영원한 세상에 뿌리 깊은 국력을 잘 배양하자”고 주장했다. 그 내용은 민족자결의 3·1독립운동은 물론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민족대동단결의 정신,김구의 민족자주노선, 그리고 당시 완전한 독립국가와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건국준비위원회와도 일맥상통한다.

송규는 '종교=도덕'은 정치의 체가 되고, 정치는 도덕의 용이라고 보며, 무아봉공의 삶이야말로 종교와 정치의 근본이라고 한다. 더불어 정치의 근본은 도덕이며, 도덕의 근본은 마음이라고 한다. 그의 스승이자 원불교를 세운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이 종교와 정치를 자비로운 어머니와 엄한 아버지에 비유하고, 도덕에 뿌리를 둔 선정덕치가 민중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을 계승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구의 정교분리는 제도적으로 정합성은 있어도 동양의 전통과는 맞지 않는다. 애초에 종교적 인간과 정치적
인간을 하나로 본 것이다. 유교의 내성외왕이나 불교의 성불제중의 이념은 인간 개인과 사회 전체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적이다. 정치나 종교는 이러한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근대국가는 상상력으로 성립된 것이며,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돈·제국·종교라는 상상력을 발휘한 사피엔스가 다른 종을 물리치고 지구의 승자가 되었다고 본다.
하긴 전국을 다 돌아보지 않고도 우리는 국가의 실체를 승인하며, 지구 반대편에서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서로 형제자매라고 한다. 결국 종교와 정치는 같은 현실에 대응하는 중층 의식의 상상의 산물이자 안전을 위한 방어막이다. 그렇다면, 수레의 한 바퀴가 비틀거릴 때 안전운행을 위해 수리해야 하는것처럼 종교도 정치가 불온할 때 마땅히 바른길로 안내해야 한다.
인류보편의 가치인 정의·자유·평등·인권·생명을 표방하는 참여불교로서의 원불교 또한 평화를 향한 민중의 염원을 대신하여 제국의 권력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한 세기 전 우리 선조들의 동학농민혁명이 이 땅에서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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