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의자를 떠올려 보자
상태바
눈을 감고 의자를 떠올려 보자
  • 관리자
  • 승인 2017.03.09 09: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도상 작가의 ‘인문학으로 대종경 읽기’ (19) ㅣ 정법현 교도(북일교당)

정도상작가.jpg

부처에게도 자성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부처의 자성은 무엇인가? 부처의 자성과 메뚜기의 자성은 다른 것인가?
부처의 자성과 살인자의 자성은 다른가? 자성이 각각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실재성이라면 살인자의 자성은 살(殺)에 있는 것인가, 인(人)에 있는 것인가? 또 묻는다. 부처의 자성은 서가모니불인가? 아니면 서가모니불의 자성이 부처인가? 자성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부처의 성품이라면, 메뚜기와 살인자의 자성은 부처가 된다. 거리를 떠도는 똥개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으니 이러한 논리적 전개가 그릇된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똥개의 자성도 '부처'인 것이다.
용수는「중론」에서'자성이란 그 자체로 변하지 않는 실체'라고 했다. 그러나 용수는 '자성이 곧 공'해야 한다고 했다. 낱낱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실체를 비워냄으로써(空) 법계의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태산이 불상을 모시지 않고 일원상을 모시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눈을 감고 '의자'를 떠올려보자. 뇌리에 떠오르는 '그 의자'가 바로 '자성'이며 플라톤이 말한'이데아'다. 눈을 감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자. 뇌리에 떠오르는 '그 사랑'이 바로 '자성'이며'이데아'다. 플라톤은 현실이란 이데아의 모방 혹은 복제라고 했다. 자성이며 이데아로서의 의자는 하나지만 현실의 의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온갖 종류의 의자가 현실에 존재하지만 우리의 뇌리에 그려낸 자성이며 이데아인 '그 의자'는 오직 하나인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사랑은 복잡하고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사랑의 배신은 지금 이 순간도 인류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사랑은 끊임없이 모사되고 복제되며 다양한 방식으로 상처를 생산한다. 그렇게 생산된 상처가 인류의 마음 창고에 켜켜이 쌓여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사물의 본질적인 원형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이란 이데아의 모사에 불과하다고 했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일시적인 속성을 지니고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철학자는 일시적인 속성을 지닌 사물의 세계가 아닌 사물의 본성과 원형에 대한 인식과 탐구를 해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적으로 말하자면 일원상은 이데아다.
일원상이라는 부처의 이데아를 복제한 것이 바로 서가모니의 형태로 지어낸 불상이다. 하지만 서가모니 불상만이 영원불변하며 오직 하나인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서가모니 불상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게 형상화되어 있다. 간다라 양식의 불상, 고려의 불상, 태국의 불상, 티벳의 불상은 그 모양과 형태가 각각 다르다. 부처라는 이데아로서는 동일하겠지만 그 불상을 빚어내는 민족과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소태산은 서가모니불을 본사로 숭배하지만 서가모니불상을 모시진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이미지의 허구와 삶의 비주체성을 경계하자는 뜻이었다. 계절에 따라 입는 옷도 우리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이뤄지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광고가 시키는 대로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이미지를 숭배하는 현대인의 특성에 기인하고 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광고에 세뇌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우아하고 교양적으로 커피를 마시며 '잘 살고 있는 것처럼'여기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삶을 자아의 의지대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인가? “자신의 의지로 산다고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지배하는 힘이 우리 마음 깊숙한 곳까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잘 사는 것 같고 시대를 앞서가는 것처럼 이미지 조작이 되어있는 것이다. 삶을 삶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용수 지음, 정화 풀어씀, 「중론」, 도서출판 법공양, 2007년, 27쪽)

소태산은 이처럼 이미지에 조작된 삶을 경계하여 삶의 주체성을 제대로 갖추라는 의미에서 일원상을 모신다고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