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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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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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4.26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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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 작가의 ‘인문학으로 대종경 읽기’ 21-01 l 정법현 교도(북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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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이 말한 인류의 장년기는 소위 근대가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고, 과학에서도 무기의 발달로 증기기관을 뛰어넘어 비행기와 잠수함까지 발전한 단계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장년기라는 개념은 인류의 탄생기와 유아기 그리고 청년기와 중년기의 시기 구분이 전제되어야만 성립이 가능하다. 물론 일반적 시대 구분의 개념은 아니다.

소태산 식의 개념인 것이다. 인류의 탄생기는 호모 에렉투스(Homoerectus, 직립인간)의 시기에 속한다고할 수 있다. 흔히 과학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이나 베이징 원인(猿人)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호모 에렉투스는 160만 년에서 20만 년 전에 존재했다. 작은 뇌용량, 원숭이와 가까운 약간 구부러진 신체구조, 손도끼 등의 타제석기를 사용하였다. 부족에도 못 미치는 무리의 형태를 이루고 살았고 주로 동굴에 거주하였다.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서 그들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유아기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슬기사람)의 시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갈 무렵인 대략 3만 년 전에 등장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으로 채집과 사냥을 하던 구석기 시대에서 농경과 목축이 가능했던 신석기 시대로 발전하였다.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이행은 문명의 패러다임이 크게 변화한 시기이기도 하다. 무리를 이루고 살던 삶에서 부족과 마을을 운영하는 삶으로 변화하였다. 이를 통해 부족국가가 탄생하였다.
인류의 청년기는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이행되어 1400년대 중반 쿠텐베르크가 성경을 인쇄하던 시기까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부여, 졸본 부여, 삼한, 가야 등의 고대국가에서 임진왜란 이전까지를 시기를 청년기라고 분류할 수 있겠다.
중년기는 유럽의 세계사 연표로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1445 쿠텐베르크의 활판 인쇄, 1484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92 콜롬부스 아메리카 상륙, 1503 다빈치 모나리자, 1517 종교개혁, 1543코페르니쿠스 지동설(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 1633 갈릴레이 이단 재판(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재판정에서 결정, 갈릴레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림), 1637 데카르트 방법서설 발표, 1776 미국독립선언, 1784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발표, 1789 프랑스대혁명」불행히도 조선은 일본과 중국이 세계사의 중심으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을 때 우물 안에 갇혀 있었다.

인류의 장년기는 16, 17세기에 시작된 과학혁명과 20세기 초반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 시기에 해당한다. 소태산은 17세기부터 시작된 과학혁명과 20세기 전반기의 기술진보를 물질개벽의 일부로 파악했다. 소태산의 물질개벽은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진보만을 표현하는 협소한 개념이 아니다. '현하'에서 끊임없이 개벽되고 개벽되는 물질의 자기확장성과 진보성으로 확장되는 개념인 것이다. '개벽'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동사이기 때문에 물질은 오늘도 개벽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후천개벽 사상이 등장한 이후가 역사의 장년기라고 할 수 있다.
소태산은 인류가 장년기에 있다고 말한 뒤로부터 무려 백년의 세월이 쌓였다. 인류는 여전히 장년기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노년기로 접어들었는가? 인류가 인류에게 그리고 지구라는 별에 끼친 물질적 해악을 보면 어쩌면 인류는 노년기에 접어든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장년기에서 오히려 중년기로 이행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중년기의 열정과 문명사적 대전환이 인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현하'의 개벽을 끊임없이 거듭하여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지식을 대체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시대로 인류는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물질개벽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물질개벽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하지 않은 채 정신개벽만 외치고 있으면서 정작 정신개벽은 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어떤 의혹에서 나는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태산이 예측한 인류의 지견은 물질을 휘황찬란하게 개벽했다. 그러나 그 지견이 정신개벽으로 향하고 있지는 않다. 원불교는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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