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가와 일초는 과연 안심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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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가와 일초는 과연 안심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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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05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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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 작가의 ‘인문학으로 대종경 읽기’ 21-03 l 정법현 교도 (북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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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와 혜가의 안심에 관한 법문은「육조단경」,「 무문관」에 등장한다. 그만큼 선가의 화두로 삼을만한 이야기라는 뜻이겠다. 달마가 면벽하고 있다. 혜가가 눈 위에 서서 팔을 자르고 말한다.

“제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부디 편하게해주십시오.”달마가말한다.“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편하게 해주마.”혜가가 말한다.“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끝내 찾을수가없습니다.”달마가말한다.“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으니라.”「무문관」제41칙에 나오는 달마안심은「전등록」권3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무문스님이 공안으로 정리해둔 것이다.

시인 고은의 법명은 일초였다. 일초스님은 당대의 고승이었던 효봉스님의 상좌였다. 일초가 지리산 쌍계사 골짜기의 작은 암자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수행을 할 때였다. 효봉스님은 한 번 선에 들면 태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효봉스님은 너무나 자주 방바닥에 잘못 놓인 구들장을 밟곤 했다. 그 때마다 구들장이'딸칵'하며 소리를 냈다. 선에 빠져 있다가도 구들장이 딸칵하는 소리에 일초의 마음은 마구잡이로 허물어졌다. 그런데도 효봉스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선에 빠져들었다. 효봉스님이 태산처럼 선을 하고 있으면 일초는 가슴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딸칵'하는 소리마다 속세의 온갖 풍경이 떠오르니 더욱이나 미칠 지경이었다.

어느 날 일초가 선에 들어 있는데 효봉스님이 측간에 가려고 몸을 일으키자 또 '딸칵'하는 소리가 났다. 효봉스님이 측간에서 돌아와 앉으려고 하는데 또 그 소리가 났다. 효봉스님은 그 구들장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다시 선에 들었다. 일초는 가슴이 답답해 아주 환장할 지경이었다. 참다못해 밖에서 곡괭이를 들고 와 효봉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방바닥을 찍기 시작했다. 효봉스님은 일초의 곡괭이질을 피해 살짝 비켜난 뒤에 계속 선을 했다. 일초는 효봉스님이 앉았던 자리를 곡괭이로 모두 찍어버렸다. 그러자 효봉스님이 한 마디 했다. “이제 편하냐?”효봉스님의 한마디에 일초는 그 자리에 엎드려“스님 살려주십시오.”라고 했다. 달마와 혜가의 이야기에 비추어도 손색이 없는 효봉과 고은의 안심법문 이야기다.


혜가와 고은의 마음은 색이며 용(用)이었고, 달마와 효봉의 마음은 공이며 체(體)였다. 그러나 체용이며 색공을 따지는 것은 무소유의 수행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아타락시아(ataraxia)'라는 말을 썼다. 아타락시아는 정신적 평정의 상태를 뜻했다. 에피쿠로스 등의 철학자는 우주를 잘 인식하여 일체의 공포에서 해방되면 아타락시아를 획득할 수 있다고 했다. 또 회의론자인 피론 등은 판단을 모두 중지하고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되면 아타락시아의 상태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행자들은 얼마든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생의 삶에서 안심이란 참으로 아득하기만 하다. 중생의 번뇌는 참으로 다양해서 안심하기가 매우 어렵다. 최저 생활비도 벌어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학을 졸업했으나 몇 번이나 취직에 실패한 젊은이에게,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난 중소기업 사장에게, 휴일은 물론이고 밤이나 낮이나 무럭무럭 자라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경영진의 경영 실패로 인한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노동자에게, 배추값이 폭락하여 배추를 밭째 갈아엎은 농민에게, 닭이나 오리며 돼지나 소를 산채로 매장하는 사람에게'안심(安心)'이란 없다. 안심이라니, 이 무슨 말장난이란 말인가.

불안이 쌓이면 불행이 된다.

현대사회에서 종교를 갖고, 좋은 신앙을 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사실로 이해하기 좋은 신앙처를 발견하여 숭배해'도 불안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의 중생들은 물질의 개벽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소외가 심화되면 자력생활이 불가능해진다. 그리되면 불안이 다양하게 중첩되고 끝내는 불행이 된다. 불행은 인간을 폐허로 만든다.

폐허를 가진 인간은'사실로 이해하기 좋은 신앙처를 발견하여'도 발길을 돌린다. 혜가가 성주 소성리의 할머니라면 안심하겠는가? 일초가 세월호의 부모라면 안심하겠는가? 혜가와 일초가 일자리 없는 젊은이라면 과연 안심하겠는가. 불안은 누구의 탓인가? 불안과 불행도 사은의 은혜인가? 이런 질문 앞에 나는 그저 속수무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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