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 오피니언] 1만 6000km, 유라시아 횡단 마라톤에 도전합니다 - 이준 열사 서거 110주기, 내가 유라시아 횡단하려는 이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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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 오피니언] 1만 6000km, 유라시아 횡단 마라톤에 도전합니다 - 이준 열사 서거 110주기, 내가 유라시아 횡단하려는 이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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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8.07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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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성(명구, 중구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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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고종은 마지막 승부수로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사람을 특사로 임명하여 헤이그에 파견했다. 이준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설립된 법관양성소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최초의 검사로 한성재판소에서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친일행위를 한 상사를 고발하는 등 사회정의 실현에 노력했으나 중상모략으로 면직을 당하고 만다.


고종은 그의 강직함과 애국심 그리고 법관으로서의 뛰어난 법리해석이 만국평화회의의 특사로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준은 1907년 4월 22일 부산에 잠시 출장을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선 후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조국을 떠났다. 4일 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상설과 합류하여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달려갔다.


이곳에서 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을 만나 합류했다. 이준은 법률가로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릴 수 있고, 이상설은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한 경험이 있고 이위종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불어를 비롯한 러시아, 영어에 능통하였다. 이들은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었다.


이들이 헤이그에 도착한 6월 25일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지 이미 열흘이 지난 후였다. 그들은 곧바로 회의장인 비넨호프 궁전으로 달려갔지만, 나라를 잃은 왕이 임명한 특사는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열강들은 을사늑약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현실을 받아들였다.


사람의 운명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하여 급물살을 타고 물줄기가 변하기도 한다. 2년 전 나는 삶이 공허하다고 느꼈고, 중년의 사춘기에 방황하였다. 느닷없이 미대륙 횡단 마라톤에 나섰다. 만 57세의 나이, 우리 나이 59세에 가슴 벅찬 도전가이자, 탐험가의 길을 나섰다. 그리고 성공했다.


나는 그때 이모작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탯줄이 필요했다. 하늘과 대지에 연결하는 탯줄을 스스로의 배꼽에 연결해 모든 낡은 에너지를 방전시키고 새로운 에너지로 채우고 싶었다. 내가 작은 발걸음을 모아 뉴욕의 유엔빌딩에 도착했을 때 나의 몸은 난파선에서 구조된 사람처럼 야위었지만 강인한 생명의 의지로 충만하게 되었다. 나는 그 여행으로 다시 태어났다.


내가 뉴욕의 함마슐트 광장에 들어왔을 때 어느 기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내게 다음 도전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아무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막연히'라도 생각하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아서“그저 막연히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는 기사에서 “강명구씨의 다음 도전은 유라시아 대륙 횡단”이라고 썼다. 그야말로 기자에게 낚인 대답이 기사가 되고, 그것이 정말 나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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