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 오피니언] 교적 12호 ‘소태산대종사 종곡유숙터’를 복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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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 오피니언] 교적 12호 ‘소태산대종사 종곡유숙터’를 복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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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9.1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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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줄포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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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대종사(少太山大宗師)는 원기 4년 8월 21일 법인기도를 통해 법계의 인증을 받고, 그 해 10월에 변산 실상사 옆에 초당(봉래정사)을 마련하고 교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영광과 변산은 200여리나 떨어진 멀고 험한 길이라서 중간거점이 필요했다. 따라서 원기6년에 곰소와 줄포의 중간지점인 부안군 보안면 신복리 종곡(宗谷)마을에 사랑채가 있는 집을 마련했다.


이 무렵에 공맹(孔孟)을 숭상하던 이춘풍 선진이 성주에서 영광으로 이거한 고모 댁에 정산종사를 환고향시키겠다는 뜻으로 왔다. 그러나 정산종사의 부친인 송벽조 선진에게 도리어 설득당해 변산에서 대종사를 뵙고 마치 우러러 받들던 공맹을 뵙는 듯 황홀하여 제자가 되기를 결심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원기6년 9월) '춘풍(春風)이란 법명을 받았다. 아마도 대종사를 뵙고 봄바람에 얼음 녹듯 감화된 심경을 법명으로 주신 듯하다. 그는 그 해를 넘기지 않으려고 원기 6년 겨울에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이사를 단행하자 소태산대종사는 사산 오창건 종사를 대전까지 보내시어 '소태산대종사 종곡유숙터'로 안내해서 수호의 책임을 주어 회상 창립에 동참하게 했다. (이춘풍은 줄포만 연안 부안군 보안면 신복리 종곡(宗谷)에 살면서 내변산 실상 초당의 대종사를 찾아 법을 묻고 가르침을 받들었다. 종곡은 변산으로 드는 초입에 있는 마을이다. 영광과 변산간 노정의 유숙처로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영산과 변산을 내왕하는 대종사와 제자들의 시봉을 맡았다)


'소태산대종사 종곡유숙터'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디재는 우동리를 거쳐 거석리로 넘나드는 고개로 산 정상을 옥녀봉이라고 부른다. 영산의 옥녀봉은 법성을 바라다보며 성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형국이라고 한다. 바디재가 있는 옥녀봉은 옥녀가 베를 짜고 있는 형국(玉女織錦形)으로 어쩌면 새 법을 짤 수 있는 성현을 기다리며 베를 짜고 있지 않았나 싶다.


'소태산대종사 종곡유숙터'는 대종사는 물론이고, 영광과 김제 방면에서 봉래정사를 찾는 제자들의 유숙터가 됐다. 특히 소태산 대종사를 봉래정사에서 시봉하던 김남천 등은 줄포 장에서 생필품을 구입해서 지게로 바디재를 너머 봉래정사로 들어갔다. 또한 대종사께서 “똥이라도 먹겠냐”며 물으신 장적조, 이만갑, 구남수 등 여자 선진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왕래했던 순례길이다. 특히 김제에서 한약방을 하던 서중안 선진도 부인과 함께 인력거를 타고 종곡에서 하루를 묵고, 봉래정사에 들어가 대종사를 뵙고 하산을 권하여 불법연구회를 공개하는 익산총부 건설의 문을 열기도 했다.


따라서 '소태산대종사 종곡유숙터'에서 바디재를 너머 봉래정사에 이르는 길은 변산제법성지의 관문이자, 소태산대종사를 모신 시봉의 길, 신성의 길이다. 그동안'소태산대종사 종곡유숙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법성지의 순례코스로 여겨왔다. 그러나 한동안 방향 없이 지내오다가 원기93년 중앙총부의 후원과 부안지구가 중심이 되어 581평의 대지를 확보했으나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몇몇 선진들이 원기 100년이 넘어가기 전에 교적지로서 면모를 갖춰야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따라 원기 100년 11월 19일에 열린 제72회 원불교 문화재관리위원회에서 교적 12호로 지정하고 교적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재가·출가가 합력해서 '소태산대종사 종곡유숙터'의 보은불사를 원만하고 신속하게 이룩해서 보다 많은 순례 객들이 시봉의 길, 신성의 길을 순례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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