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타력 병진신앙(自他力竝進信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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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력 병진신앙(自他力竝進信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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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1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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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튼교무의 정전산책 (102) ㅣ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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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심고와 기도」에서 '사람이 출세하여 세상을 살아가기로 하면 자력과 타력이 같이 필요하나니, 자력은 타력의 근본이 되고 타력은 자력의 근본이 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일생을 살아갈 때 자력과 타력이 필요하며, 자력과 타력은 서로의 바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할 만한 타력을 얻은 사람은 나무뿌리가 땅을 만남과 같다.'며 '우리는 자신할 만한 법신불(法身佛) 사은의 은혜와 위력을 알았으니, 이 원만한 사은으로써 신앙의 근원을 삼으라.'고 합니다.


또한 『대종경』신성품 8장에서 “삼보를 신앙하는 데에도 타력신과 자력신이 있는데, … 이 두 가지는 서로 근본이 되므로 자력과 타력의 신앙을 아울러 나가야 하나, 공부가 구경처에 이르고 보면 자타의 계한이 없이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한 가지 삼보로 화하게 된다.”하십니다.


그리고 “타력신은 사실로 나타난 불(佛)과 법(法)과 승(僧)을 사실적으로 믿고 받는 것”이라면 “자력신은 자성 가운데 불과 법과 승을 발견하여 안으로 믿고 수행함”이라 합니다.


타력신의 사실로 나타난 불법승 삼보는 법신불 사은으로 달리 읽을 수 있으며, 이 사실로 나타난 사은을 오롯이 믿는 신성 자체가 되면 일체의 분별이 다 탈락되어 안으로 텅 빈 자성에 이르게 되어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한 가지 삼보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즉 온전하게 믿는 신성과 공적영지의 자성이 하나로 관통되어 공부가 자타의 경계가 없는 구경처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타력신의 신앙과 자력신의 수행은 사람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깨달음과 낙(樂)에 이르는 두 가지 방법으로, 신앙의 방법이 효과적일 때가 있고 수행의 방법이 적절할 때가 있겠지만 궁극에는 하나로 관통되는 것입니다.


즉 신앙에는 타력신앙과 자력신앙이 있으며, 타력신앙을 협의(狹義)의 신앙이라 한다면 자력신앙은 협의의 수행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이 신앙과 수행을 병행하여 '자타력병진신앙'이라 총괄할 수 있으며, 이 자타력병진신앙을 '넓은 의미(廣義)의 수행'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 정전』「수행편」의수행과 <일상수행의 요법>의 일상수행은 신앙과 수행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수행인 것입니다.


「교전 제2차 감수의 서한選」중 '결의사항개요'에 “「심고와기도」장, 「불공하는 법」장은 수행편 제9장과 제10장으로 편입, 이 두 장은 신앙관계인데 어찌 수행편에 편입할 수 있느냐 하여 신앙편 독립설까지 있었으나 결국 교의편은 교리의 이론적 해의이고 수행편은 교리의 실천적 방법이지 신앙과 상대되는 의미의 수행이 아니니 신앙에 관계되는 이 양편을 전기(前記)와 같이 편입하는 것이 가하다고 합의되었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부터가 사은사요를 다 포함하지 않았느냐는말씀이나왔습니다.(『교고총간』제6권, 315쪽)”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위의 서한선에 근거할 때, 진정으로 수행할 때는 신앙과 다른 것이 아니며, 신앙이 곧 수행으로 수행이 신앙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둘로 나뉘어서 그 경계에서 둘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다른 두 모습입니다. 하나를 바라보는 중심축과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즉 신앙과 수행은 둘이 만나서 하나인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이면서 타력으로 보면 신앙이요 자력으로 보면 수행인 것입니다. 지혜의 수행 속에 은혜가 있고 은혜의 신앙 속에 지혜가 있는 것으로, 지혜와 은혜는 하나이면서 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력신앙과 자력신앙은 두 부류가 아니라, 다만 타력에 중심축을 둔 효과가 있고 자력에 중심축을 둔 효과가 다를 뿐입니다. 근본이 다른 것이 아니라 심고와 기도할 자리가 있고 염불과 좌선 할 자리가 있는 것처럼 대상과 경계를 따라 중심축을 달리 세운 것입니다.


'법신불 사은이시여!'라는 간절한 기도 속에 자성불이 역력히 드러나 있는 모습을 보아야 하며, 자성반조에 사은의 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모습을 감지해야 합니다. 보은에 삼학수행이 활활 타오르고 있으며, 삼학수행에 사은의 도가 역력히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서품 19장) 내재적 자성이 곧 우주성으로 자성과 우주에 분별이 없습니다.『( 회보』34호, 「신앙과 수양」)


'법신불 사은이시여'할 때는 자성불이 결여되어 있고, 자성불 수행만 하면 신앙이 결여된다는 생각은 다 분별심인 것입니다. 결국 신앙과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 일원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양대방법이며 일원의 진리를 나투는 이중주인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신앙하며 보은·불공할 상황이 있고, 또는 수행하며 훈련·적공할 상황이 있는 이중주의 연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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