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보낼까요, 나의 그리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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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보낼까요, 나의 그리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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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26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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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유행가」(34) ㅣ 조휴정 PD(KBS1 라디오 PD, '함께하는 저녁길, 정은아입니다' 연출)

최양숙 '가을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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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만 계속된다면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될 겁니다. 가을의 쨍한 하늘과 쌀쌀한 바람, 붉고 노랗게 화려한 자태를 뽐내다 이내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정말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관심 없이 지나치던 익숙한 길가의 벤치에도 한 번 앉아보고 싶고 번잡한 도심에서도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 같고, 무작정 떠나고 싶기도 한 들쑥날쑥한 감정들. 그런가하면 하루하루 메꾸듯 살아가는 내 삶을 되돌아보는,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이기도하죠. 아마도 가을이 인생으로 치자면 5,60대쯤이라 더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젊어서도 가을을 심하게 좋아했지만 이제 제 나이와 딱 맞아 떨어지니 그저 좋은 것을 넘어서서 어떤 '경건함' 마저 느껴집니다. 예전에는 나이 60이 가까우면 새로운 삶의 스토리는 멈추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고도 뭔가가 또 바뀔 수 있다니.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데도 뭔가가 또 새로운 고통과 슬픔과 환희가 남아있을 줄 몰랐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아무리 나이가 많아져도 나름의 스토리가 있고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깨닫고 난 후, 가을은 그저 로맨틱하고 센티멘탈해지는 계절로만 다가오진 않습니다. 가을은 사람을, 사랑을, 인생을, 인연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계절이었던 겁니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기보다 결국 인생의 계절인 셈이죠. 그래서 최양숙의 '가을편지(1971년, 고은 시, 김민기 작곡)'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왜 모르는 여자, 외로운 여자, 헤 매인 여자가 아름답다고 하는지 100% 와 닿지 않았거든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 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 매인 마음,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읊어보고 불러봤을 '가을편지'는 가을 노래의 레전드 입니다. 수많은 가을 노래가 있으나 '가을편지' 다음입니다. 50년이 다 되가는 노래지만 여전히 가을에는 들어야하고 많은 가수가 다시 불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가을편지'는 역시, 최양숙입니다. 서울대 성악과 출신의 그녀가 부르는 가을편지는 쓸쓸함과 도도함과 따뜻함과 이국적인 매력이 고루 섞여 그야말로 낙엽 쌓인 공원에 버버리코트 깃을 한껏 세운 세련된 가을 여인이 보이는 듯 합니다. 1962년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후 샹송가수로 활약한 최양숙은 저에게도 매우 원로가수느낌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부른 '가을편지'는 그야말로 클래식이 되었고 앞으로 더 세월이 흐른 후 들어도 좋을 겁니다.


사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가 언제 우표 붙인 편지를 써봤더라 생각해보곤 하는데 기억이 희미합니다. 학교 다닐 때만해도 편지 쓰기를 누구보다 좋아했고 라디오피디로서 '편지'는 정말 익숙한 소통수단인데도 말이죠.


입사 초, 저의 주 업무는 프로그램 앞으로 온 수백 통의 편지를 읽어보고 정리하는 것이었고 그 속에 담긴 청취자의 희로애락은 프로그램의 알파요 오메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편지를 보내는 청취자는 거의 없습니다. 사라져가는 것들,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지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도 나이가 주는, 가을이 주는 쓸쓸함이겠지요? 하지만, 이제 그 쓸쓸함마저도 소중하고 달달하게 느껴집니다. 늘 긴장하며 사는 인생이지만, 가을에는 감상의 늪에 푹 빠질 겁니다. 그건 가을에 대한 예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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