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 오피니언] 불교와 폭력, 불교는 배반했는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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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 오피니언] 불교와 폭력, 불교는 배반했는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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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1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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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용(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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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군사적 폭력이 자비로 전환되는 전형적인 예로 아쇼카 왕의 선정(善政)을 떠올린다. 칼링가 전쟁의 무참한 살육전 이후, 아쇼카 왕은 폭악 군주에서 정의와 자비의 제왕으로 변신하였다. 아쇼카 왕의 비명(碑銘)은 그가 종교 간의 갈등을 포용과 공생의 관계로 바꾸고, 종교와 현실 정치의 상관관계를 잘 매듭진 것을 보여준다. 그는 힘과 살육으로만 제패하려던 현실을 달리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불교적 “달리보기”로 정치 현장을 풀어갔다.


곧 현실에 참여된 불교를 표방하였다. 그에게 문제는 불교 교설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 어떻게 적응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경우, 서산,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당시청정수행의 선승으로서 살생이 자행되는 전장 터로 뛰어 들어갔다. 우리는 이 분들의 위대함에 환호한다. 그러나 불승으로서 적을 무찔렀기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말살하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함이었기에 그 위대한 가치를 현양하는 것이다. 동족을 구한 국가주의, 민족주의 때문에 그분들의 정신이 고귀한 것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의 선 불교도 정치 현장에 개입했다. 그러나 일본 선불교의 경우에는 침략정책을 합리화했기 때문에 그 잘못을 지적당하고 있으며, “전쟁을 하는 일본 선(Zen at war)”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살생과 폭력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선승의 도리이고 불자들의 확고한 신념이다. 그러나 보편적 사랑과 자비의 이념은 현장을 따라 다른 모습을 띌 수 있다. 불교 이념은 구체적 현장에 적용되고, 이에 따라 현장은 변화되고 현실은 개혁된다. 아쇼카 왕이 그랬고 서산, 사명대사가 그랬으며, 정반대의 방향이지만 일본의 선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현장의 평가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참여된 불교의 현장만이 우리들에게 종교의 구체적인 자비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불교가 배반을 한 것이 아니라 불교를 담지(擔持)하는 우리가 배반을 하는 것이다.


외신을 통해 전달되는 곤혹스러운 정치 현장들이 우리 앞에 있다. 그것을 어떻게 돌파하느냐의 요청이 우리들(불자들)의 결단의 태도를 기다린다. 곧 아쇼카 왕이거나 서산, 사명대사 같은 불법의 담지자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가 구체적으로 참여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미얀마의 잔인한 인종청소 행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종교의 다름, 종족의 차이를 부추기며 그것을 폭력의 원인으로 확대시키는 행위도 중단되어야 한다. 또 그런 차이를 마치 적대적인 세력의 길항관계로 보도하거나 이끌어가는 의도 역시 중단되어야 한다.


아웅산 수치가 받은 노벨평화상을 박탈하라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게 한들 노벨상의 이념을 깨끗하게 할지는 모르나, 이미 더렵혀진 학살의 현장이 청정해질 수는 없다. 깨끗함을 표방한 또 하나의 비난과 저주의 악순환이 되풀이될 뿐이다. 외신이 전하는 미얀마사태를 바라보며 불교의 이념이 얼마나 공허해 질 수 있는지를 절감한다. 하지만 불자 한 사람의 참여가 불교의 배반을 역전시킬 수도 있음에 희망을 걸고 곰곰이 반추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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