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에 자유를 얻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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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에 자유를 얻는 것이니라
  • 관리자
  • 승인 2018.02.03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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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처음 만나는 명상(27) ㅣ 박대성 교무(본지 편집장, 길용선원 지도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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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生死)에 자유를 얻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인지(永生不死), 궁금해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우주를 살 수 있을 만큼의 금은보화(金銀寶貨)가 주어진다고 해서 물질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끝 간곳을 모르고 더욱 치솟는 자신의 탐욕과 만날 가능성이 더 커져만 갈 것입니다.

육신을 지탱하는 생명의 수량이 늘어난다고 생사에 자유롭게 되지는 않습니다. 일정부분 생에는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죽음의 공포는 시시각각 그를 덮칠 것입니다.


근래의 어떤 종교에서 영생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교주는 죽지 않고 육신 그 자체로 불멸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주는 살인사건에 연류가 되어 법의 심판을 받던 도중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남아있는 신도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구세주가 죽은 것이 아니라 다시 부활해서 자신들을 찾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죽음을 벗어나겠다는 강렬한 욕망이 한 편으로 왜곡되어 태도와 행동이 일관되지 않은 모순된 상태를 보여주는 '인지부조화'의 사례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의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삶의 조건 속에서 비굴하지 않고 죽음에 직면해도 당당하고 흔들리지 않는 본래의 중화(中和)된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실존적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문제 앞에서 벌어지는 우울과 불안은 극도에 들어가 우리를 생의 노예로 만들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선을 통해 이 세상은 오고 가는 이치로 건설되어 있음을 곧바로 볼 수 있다면 관념적 생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생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삶과 죽음을 별도로 분립된 것으로 본다면 경험하지 못한 죽음이라는 대상은 감당하지 못할 엄청난 공포와 절망으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는 단절의 세계가 아니라 연속되고 순환하는 구조로 맞물려 돌아갑니다. 이에 소태산대종사께서는 “사람의 생사는 비하건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것과 같고, 잠이 들었다 깨었다 하는 것과도 같다(「대종경」천도품 8장)”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또한 정산종사께서는 “생사대사를 해결하는 데에 세 가지 계단이 있나니, 하나는 본래에 생사가 둘 아닌 자리를 깨달아 아는 것이요, 둘은 본래에 생사가 없고 생사가 둘 아닌 자리를 체 받아 지키는 것이요, 셋은 본래에 생사가 없고 생사가 둘 아닌 자리를 베풀어 활용하는 것이라, 이 세 가지 계단의 실력을 구비 하여야 생사대사를 완전히 해결했다 하나니라(「정산종사법어」생사편 1장)”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몸을 나라고 판단하고 집착하게 된다면 이 몸을 유지하고 있는 삶이라는 영역은 놓칠 수 없는 강력한 애착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이 몸을 무너뜨릴 죽음이라는 영역은 피하고 싶은 강력한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생사에 대한 집착을 끊고 이것이 둘이 아닌 이치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학문이나 지식이 아닌 벼락과 같은 강력한 지혜의 힘이 필요합니다.


흔히 말하는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산스크리트어 와즈라(Vajra)를 해석 한 것입니다. 이는 다이아몬드와 번개라는 두 가지 뜻을 함께 가진 단어입니다. 우리가 생과 사라는 상에서 나온 모든 집착을 놓아버린 공(空)의 진리를 다이아몬드로 된 벼락처럼 휘둘러 마음속의 분별, 집착, 번뇌 등을 부숴버리게 되면 돌아보지 않고 곧장 깨달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생사에 자유를 얻는다는 표현 자체가 둘이 아닌 성품의 원리를 투철히 체득한다는 의미이며 그 원동력은 곧 선을 통해 마련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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