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이 간다┃오키나와를 할퀸 고난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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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이 간다┃오키나와를 할퀸 고난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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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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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양국의 종교·시민사회 활동 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평화를 연구하는 씰(SEAL : 동아시 아 리더십 스쿨(school for east asia leadership))이 올 해는 일본 오키나와에‘종교 인이 만드는 평화 - 군사주의 와 민족주의를 넘어서’를 주 제로 2월 7일 부터 11일까지 5일간의 일정으로 답사를 다 녀왔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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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방의 빛나는 별, 오키나와
오키나와는 일본의 남쪽, 류큐(琉球) 제도에 위치하고 있다. 기후는 한겨울에도 평균 기온이 18℃이상 되는 열대 기후로 씰 일행이 방문하던 당시는 설날 이전이었는데 평소 오키나와의 겨울 날씨 같지않은 날카로운 바람이 불기도 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는 류큐왕국이라는 이름의 독립 국가였지만 메이지(明治) 시대에 일본에 의해 병합되고 만다. 이전까지는 일본과 청나라 양쪽의 문화가 혼합됐다. 일례로 유명한 무술인 '카라테(공수도(空手道))'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오키나와 무술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일본 본토와는 다른 문화와 풍속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려한 경관을 지닌 지역적 특성상 관광 산업이 크게 발달한 곳이다.


제주도의 2/3 크기인 이 섬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군에 의해 점령당한 이후 1972년 이른바 오키나와 반환이 이루어질 때까지 미국의 통치를 받았다. 물론 지금도 오키나와 전체 면적의 20%가 미군 기지로 쓰이고 있고 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미군 범죄는 오키나와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1972년 부터 1995년까지 23년 동안 미군 및 미군 군속이 저지른 범죄는 약 4,716건에 달하며, 민간인이 살해된 것도 12건이나 된다. 특히 1995년 미군 병사 3명이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한 사건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쌓이고 쌓인 불만과 울분을 일거에 폭발시켜 심각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2004년에는 후텐마 기지에 인접한 오키나와 국제대학 교정에 해병대 헬리콥터가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나 주민들의 불안감을 키웠고, 2012년에 들어서는 미군이 오스프리 수직 이착륙기의 후텐마 및 가네다 기지 배치를 강행하려다가 주민들의 강한 반발로 보류한 일도 일어났다.


2005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오키나와 주민 1,029 명 중 40.6%는 자신들이 일본인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오키나와인이라고 답했다. 또한 같은 해 조사에 따르면 오키나와인의 25%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해 류큐공화국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가리유시클럽이라는 이름의 지역정당이 독립을 위한 활동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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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위에서도분단은지속된다.
현지에 도착한 일행들은 이국의 정취를 맛보기도 전에 오키나와 평화공원에 도착했다. 태평양전쟁으로 희생당한 일본·조선·연합군을 기리기 위해 오키나와 남쪽 60만평의 대지 위에 조성된 공원으로 유독 푸르고 푸른 이토만(灣)을 곁에 두고 있다.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2일까지 약 백일이 넘게 지속된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총알받이 역할을 강요당한 주민들에게는 거대한 재앙이었다. 소박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게 일본 군인들도 그저 무서운 외지인일 뿐이었다. 약 8만 명의 남성들이 강제 징집되어 미군과 싸울 것을 강요받았고, 13만 명의 여성과 노약자들이 인간 방패역할을 해야만 했다. 이 중에는 조선에서 징용된 1만 명의 노동자와 위안부들이 이유도 없이 피를 흘려야만 했다. 미군에게 잡힐 바에는 자결을 하는 것이 낫다는 일본군의 선전에 주민들은 집단자살을 강요받기도 했다. 이때의 참상은 몇 년 전 개봉된 영화 '핵소 고지'에서도 잘 그려져 있다.


1975년에 개관한 이 공원은 일본군 위주로 구성되어 전쟁을 미화하는 역할을 했지만 주민들의 지속적인 요청으로 2000년에 새롭게 개관해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알려주는 교육시설로 오키나와 지역의 모든 학생들에게는 필수 견학 코스로 또한 매년 100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곳이다.


특이한 점은 공원 한 가운데 지그재그 형태로 전쟁에서 희생된 약 24만 명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刻銘碑)가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조선인 326명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하나의 나라에서 징용 온 선조들은 타국에서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별개의 돌 위에서 마저 분단을 겪고 있다.


그나마 각명비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원혼들이 지금 이순간에도 구천을 떠돌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묵직하기만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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