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강좌┃원불교 사드철폐운동의 의미(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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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강좌┃원불교 사드철폐운동의 의미(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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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4.07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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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참여와 평화운동의 당위성

사드반대운동에 참여하는 원불교의 종교적인 성격은 시민종교와 공공종교라고 할 수 있다. 역으로 이러한 성격을 살펴보면 원불교의 사드반대운동에 수반되는 평화운동의 당위성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원불교의 시민종교성에 대해서 살펴보자. 원불교는 시민종교에 대한 논의가 서양에서 한참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탄생되었다. 시민종교에 대한 논의는 프랑스 제3공화정에서 1905년 정교분리법이 제정되고, 근대국가로서의 종교와의 분리를 통해 종교의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과도 중첩된다. 근대사회는 정치, 사회, 문화적인 중세의 종교 지배로부터 벗어나면서 확립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국가의 사명 또한 공백이 된 종교의 역할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 대두된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국가에 의해 완전히 대치되거나 사라진 것은 아닌 것이다.


시민종교에 대해서는 루소, 칸트, 뒤르켐, 또크빌, 벨라 등이 주도되어 논의해 왔다. 이를 종합하면 시민종교는 자신의 신성한 영역을 사회에 개방하는 종교다. 사회의 통합과 영성의 사회적 공유, 모든 사회활동의 동기를 부여하는 동시에 모든 존재의 근거를 합리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종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 한다면, 원불교의 입장에서는 일원상의 진리와 사은사요의 교리가 보편화되는 것일 것이다. 종교의 교의가 보편화되는 것이다.


원불교의 종교적 성격에 대해 필자는 이미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라고 밝혔다. 이는 불교의 역사에서는 시기상응(時機相應)으로 표현되어 왔다. 이 양자는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이다. 원불교는 불법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위해 태어난 교단이다. 참여불교야말로 시민종교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시민종교의 원불교적 근거는 엄밀히 말해 사은사요를 의미한다. 원불교의 사회참여적 성격은 교육과 복지를 교단방향의 3요소로 제정한 것, 사은은 사회평화의 원리라고 하는 점, 사요가 세계의 불평등 요소를 개선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사회적 교리라고 하는 점에서 이미 참여종교로서의 교의는 확보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단 여기서 종교의 사회참여에 대한 정의를 필자 나름대로 내리고자 한다. 첫째는 개인적인 신앙와 수행의 영역을 넘어 사회에 적극적으로 종교적 교의를 확대하고,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이러한 참여에 있어 사회의 갈등과 모순적인 요소를 파악, 제거하기 위한 교의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셋째, 단순한 복지나 교육도 종교의 사회참여 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이를 넘어 사회적 정의와 평화, 인권과 생명을 위해 적극적인 종교적 활동을 하는 것까지를 말한다.


부르디외 ((Pierre Bourdieu : 1930~2002)는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자본을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으로 구분한다. 이 가운데 종교는 이 모든 분야에 소속되어 있다. 종교 경제, 종교 문화는 신자들의 네트워크, 상징자본은 신념과 태도의 정당화를 말한다. 이처럼 자본으로서의 종교조차 그 자체로서 사회적 산물이다.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자명한 사실을 원불교는 교의화한 것이다. 사은과 사요는 종교가 전체시민에게 갈등보다는 화해를, 분열보다는 통합을, 시기 질투 보다는 이해와 자비를 주는 교의이다. 이 교의는 또한 시민이 요구하는 합리적 성찰 이 가능하다. 이는 일원상의 진리가 보다 중생 제도를 위해 현실화된 것에서 연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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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원불교의 공공종교로서의 성격이다. 공공종교는 최근 한일간에 확산되고 있는 공공철학에 기반한 논의이다. 공공철학을 하나의 학문적 장으로 이끈 사람은 김태창(공공철학공동(共?)연구소장)이다. 그는 공공철학을 세 가지 차원의 상호운동이라고 보고,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첫째, 우선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고 책임지는 철학이다. 둘째, 전문가의 철학으로 공공성의 개념 형성, 역사발전 및 현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셋째, 공공(하는)철학으로 공(公), 사(私), 공공(公共)의 자기, 타인, 세계를 상호 운동하는 관계로 파악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공과 사의 관계를 '활사개공(活私開公: 매몰된 사를 살리고 공을 열어 조화를 꾀하는 것)'과 '공사공매(公私共媒: 공과 사가 함께 매개되는 공공성을 지향하는 것)'로 정의를 내린다.

다소 사회철학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지만, 역사적 현실을 통해 조명해 보면, 이 철학이 주장하는 것은 자명하다. 한 마디로 역사 속에서 개별화되거나 분리되었던 공과 사가 조화를 이루며,이를 통해 시민사회의 발전을 추동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성환(서강대학교 조성환 교수)은 동양적 세계관의 바탕에서 공공성 개념의 기원을 찾고 있다. 그는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이해하기 위한 일환으로 먼저 '공공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는 김태창의 연구에 기반하여, 한자어 '공공(公共)'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에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처음 등장한다고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사기』에 수록된 『장석지(張釋之) 열전』에 처음 나오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제아무리 천자라 할지라도 법은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평하게 지켜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결국 '공공'은 '모두와 함께 한다'거나 '공평하게 함께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김태창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공'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공공이 관념적인 철학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그는『사기』의'공공지리(公共之理)'를 통해 공공철학은 공리로서 모든 사회적 존재에게 적용되는 원리가, 주자가 말하는 '우주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이라는 우주론적인 원리로까지 확장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근대에 와서는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국가에 예속됨으로써 세속화 되었다고 본다. 그는 이처럼 공공철학을 보편성의 원리로부터 우주론적인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키고자 하고 있다. 여기에서 비로소 존재의 본질과 가치를 중시하는 종교와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원불교는 공공철학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이는 한 마디로 공공종교로서의 철학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의 교의는 열려져 있다. 앞에서 김태창이 언급했듯이, 공공종교는 사회와 민중 속에서 활사개공, 즉 개인의 존엄성을 확보하고, 함께 공공의 가치 확보에 참여하는 종교를 말한다. 종래와 같이 개인이 공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닌 개인이 부처로서 우뚝 서서 모든 공공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또한 불의와 부조리를 현실에서 타파하는 종교를 말한다. 원불교의 입장에서는 일원상의 진리에 기반한 삼학팔조와 무시선의 진리가 편만한 세상이다. 또한 불의와 부조리를 현실에서 타파하는 종교를 말한다.


삼학의 정신수양이 분별성을 타파하자는 것은 자(自)와 타(他)의 경계, 심과 물의 경계, 주관과 객관의 경계, 인종과 민족과 국가와 지역과 세계가 이미 하나로 전개되고 있음을 인식론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활사개공의 세계가 어디에 있는가. 역사적인 오류인 '멸사봉공'의 용어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사(私)가 희생되므로써 그 말의 본질은 무시되고, 공공철학에 반하는 역사적 용어가 되었다. 원불교의 무아봉공은 소아가 아니라 대아의 개념이다. 이는 수천년간 종교가 지녀온 덕목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한 삼학팔조와 무시선은 현실의 삶에서는 모두가 정의를 이 사회에서 실천하는 교의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 교의를 탈역사적이고, 탈공간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종교가 역사와 민중의 현장에 있는 것처럼, 교의 또한 역사와 민중과 함께 현존하며, 존재의 방향을 주재한다. 예를 들어, 맹자의 사단론이 역사성을 띨 때, 그 가치를 발하게 된다. 초역사적인 교의는 역사와 당대의 민중을 기반으로 할 때 역으로 그 초월성을 담보하게 된다. 기독교의 성육신과 부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역사를 통해 구현된 것이다. 그 역사에서 현장성이 망각될 때, 종교는 관념화 된다. 소태산이 역사의 질곡에서 일원상의 진리를 드러낸 것은 역사 위에 교단과 교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 진리가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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