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수양과 공심公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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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수양과 공심公心
  • 관리자
  • 승인 2018.08.1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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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튼교무의 정전산책 (122) ㅣ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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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정신 수양의 결과」는 “우리가 정신 수양 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면 정신이 철석 같이 견고하여, 천만 경계를 응용할 때에 마음에 자주(自主)의 힘이 생겨 결국 수양력(修養力)을 얻을 것이니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정신수양을 하면 경계에 스스로 주인이 되는 자주력이 생겨 수양력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성질(분별성)과 주착된 습관(주착심)에 끌려가지 않고 항상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세우는것으로, 이러한 정신이 돌이나 철같이 견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래 오래 계속하면'은 욕심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고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지속적으로 양성하면의 뜻입니다.


# 정신수양의 영역
여기서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수양 공부는 개인차원의 수행이냐는 것입니다. 수양력의 영역이 어디까지 미치느냐는 것입니다. 정신수양의 목적은 천지만엽으로 벌여가는 욕심을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전한 정신을 얻어 자주력(自主力)을 양성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주의 힘은 어디까지 미치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욕심의 양태를 살펴보면 제거해야 할 욕심과 키워야할 욕심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키울 것이니, 작은 욕심을 큰 서원으로 돌려 키워라”(수행품 36장)고 하셨으며, 정산종사는 “서원은 나를 떠난 공(公)을 위하여 구하는 마음이요, 욕심은 나를 중심으로 사(私)를 위하여 구하는 마음이니라.”(법훈편 23장) 하셨습니다. 이로보아 정신을 수양한다는 것은 사사로운 욕심은 제거하나 공도를 위하는 서원은 키워가는 것으로, 수양력은 공심(公心)으로 나아가는 기반인 것입니다.

# 수양력과 공심
상황을 전제해 보겠습니다. 어떤 스승이 제자에게 좌선을 지도하여 마음의 안정과 삶의 평온을 찾도록 했다고 합시다. 그리하여 스승과 제자는 안락하게 소요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승과 제자가 사는 마을에 문제가 생겨 시끄러워졌습니다. 동네에 오염물을 배출하는 공장이 들어와 숨쉬기 곤란하고 식수도 오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으론 평화롭지만 사회 공동체는 평화롭지 못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개인이 변해야 사회가 변하고 사회구조가 개선되어야 개인이 안락하게 되지만, 만일 사회구조가 변하지 않은 채 개별 존재만 개선시키려 한다면 개인은 바뀔지 몰라도 전체구조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이 생산적인 욕망회로로 바뀌어 전체가 살기 좋은 관계로 추구되지 않는 한 공동체도 평화롭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아를 개별적으로 상담하여 개선을 시켰다 해도, 개별적 한 사람은 치료되어 현 체제에 편입될지는 몰라도 전체로 볼때는 문제아는 계속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문제아를 자연스런 구성원으로 대하는 전체의 시각이 달라져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하겠다고 해도 설사 구원했다 해도, 개별자는 구원될지 몰라도 전체구조로 볼 땐 큰 변화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별의 수양이 필요조건이라면 전체 구조의 개선은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전체의 구조를 바꾸지 못하면서 개별자의 노력만을 앞세우면 이는 체제의 책략에 놀아난 것일 수 있습니다.


수양의 결과가 개인 차원의 안락에만 머물면 이는 협소한 관점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에서 서로의 수양에만 안주하는 인정투쟁만으로는 새로운 가치로 전환코자 하는 욕망의 길은 막혀버릴 것입니다. 사회 전체 또는 교단의 공도라는 비전에 생산적 욕망이 실현되지 않으므로 개별적인 수양에 머물게 됩니다. 전체 공익성의 실현이라는 욕망과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서원이라는 또는 공도라는 비전의 욕망 덩어리가 해소되지 못하므로 세속적인 욕구나 미디어 등의 스팩타클한 쾌감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욕구-요구의 교차로에서만 사는, 그래서 큰 욕망을 거세하여 상투적인 욕구에만 빠져들기에 생산적인 욕망과 멀어지는 삶이 될것입니다.


정신을 수양한다는 것은 사사로운 욕심은 제거하지만 큰 욕심은 더욱 키워내어 결국 생산적인 공익 실현으로 나아가야할 것입니다. 수양하면 자리이타의 공심(公心)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수양은 보은봉공에 기반을 둬야 합니다. 그래야 수양력이 보은봉공의 길에 들어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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