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적산방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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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산방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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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9.13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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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만나는 한국 토착 사상 기행 - 20 | 천지은 교도 (원불교출판사 편집장, 남중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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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토착사상사라는 하나의 장구한 궤적 위에 일부 김항을 올려놓는 순간 그가 몰입한 『정역(正易)』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 되었다. 일부 김항은 후천 개벽의 토착사상사에서도 아주 낯선 이름이었다.


특히 이 정역이 완성된 곳이 충남 계룡산 국사봉 아래 향적산방이었다니 관심이 더욱 쏠렸다. 우리에게 계룡산이 어떤산인가. 계룡산은 민중의 어떤 새로운 힘이 불끈 솟아오르는 것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는 산이 아니었던가.


이곳에서 사상을 펼친 일부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그곳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정역』을 공부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으나 일단 카메라를 들고 향적산방을 향해 길을 나섰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일부와의 만남은 익산 원불교총부에서 출발한 지 40여 분 만에 목적지 주변 무상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도심에서 이처럼 가까운 곳에 오랜 역사와 사상적 깊이를 만날 수 있는 여정이 있다는 것에 새삼스레 놀랐다.


향적산방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는 여러 글에 의하면, '무상사를 지나서 길이 있다'라고 되어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무상사에서 길은 끊길 뿐이었다. 그래서 일단 우리는 무상사 종무소로 갔다.


스님은 아닌 듯했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에게 정중하게 향적산방 가는 길을 물었다. “이곳은 무상사 절입니다. 그런 곳은 모릅니다.”그는 거듭하여 냉정하게 말했다. 우리는 실망하여 종무소를 나왔다. 그는 정말길을 몰랐을까? 우리는 길을 모른다고 했던 그의 태도에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무상사 입구에서 바로 오른쪽으로 몇 발짝만 떼니 버젓이 '향적산방'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길의 초입은 다소 오르막의 느낌이었으나 비교적 평탄했다. 그러나 십여 분정도 올라가니 곧장 가파른 능선길이 나타났다. 사륜구동 차량은 다닐 수 있는 폭의 임도였지만, 걷기에 힘이 들 정도로 가팔랐다. 등에 땀이 촉촉이 밸 만큼 올랐을 때 향적산방이 나타났다.


일부는 이곳 향적산방에서 주역을 공부하다가 득도하였다. 일부가 공부하던 당대에는 기껏해야 짚이며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비바람을 피할 정도의 초가가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지금의 향적산방은 일부의 사상을 이어온 학산 이정호(1913~2004년) 선생이 이곳에 집을 짓고 제자들과 함께 정역을 공부하며 지은 거처이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 후기 후천개벽사상의 시작을 알리는 『정역』의 저술에 들어갔다. 『정역』을 저술하고 있을 때 향적산방 옆 거북바위 아래 작은 바위굴에서 기도하며 수행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정역』을 배울 것을 청하여 제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후 제자들이 신종교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를 창시하였지만 직계가족과 유교적 성향의 제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김항은 『정역』을 통해 후천개벽의 사상의 단초를 열었다. 그것을 '후천역(後天易)'이라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 무상사 종무소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알면서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뚝 뗐던 그 사람처럼 우리의 토착사상사에서 일부 김항은 이미 잊혀진 존재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 사진 설명 : 향적산방 - 충남 계룡시 엄사면 향한리 국사봉 아래, 일부는 계룡산 향적산방에서 주역을 공부하다가 득도하였다고 한다. 일부가 공부하던 당대에는 기껏해야 짚이며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비바람을 피할 정도의 초가가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지금의 향적산방은 일부의 사상을 이어온 학산 이정호(1913~2004년) 선생이 이곳에 집을 짓고 제자들과 함께 정역을 공부하며 지은 거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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