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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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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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2.25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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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교무의 ‘유림산책’儒林散策 (29) | 박세웅(성호) 교무(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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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20여전에도 같은 이름의 시험을 본 한 사람으로서 그동안 대학진학을 위해 고생한 모든 학생들이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래본다. 문득이런생각이든다. '왜 대학에 가려고 할까? 대학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유가에서는 대학하면 자연스럽게『대학(大學)』을 떠올리게 된다. 대학은 대인지학(大人之學)의 준말로 옛날 태학(太學)이라는 국가교육기관에서 대인을 양성하기 위한 학문이었다. 『대학』에서는 대학의 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에 있다.”(『대학』경문1장: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新]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얼핏 보기에도 오늘날 취업을 위주로 생각하는 대학의 길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혹자는『대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도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대학의 도는 우리 모두가 배워야할 중요한 가르침임을 알게 된다.


좌산상사는 명덕이란 우리의 영성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본래 맑은 그대로의 영성은 영으로서의 생명력이 가장 왕성할 뿐만 아니라 가는 곳 마다 은혜를 생산해 낸다. 이것은 마치 물이 맑아지면 물의 생명력이 왕성해지고, 생명력이 왕성한 물은 가는 곳마다 무한 은혜를 생산해내는 것과 같다. 반대로 오염된 물은 생명력을 잃을 뿐 아니라 독성까지 생겨서 가는 곳 마다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이 영성을 어떻게 관리하고 활용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대학』에서 명덕을 밝힌다는 말씀은 방치하면 어두워지고 수행하면 밝아지게 되는 영성의 원리를 따라 영성을 가꾸어간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민이란 대종사의 말씀에 따르면 안으로 자기를 반성하여 각자의 병든 마음을 치료하게 하는 동시에 선병자의(先病子醫)라는 말과 같이 밖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세상을 치료하는 데에 함께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용어를 빌리자면 명명덕은 성불, 신민은 제중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선(至善)에 그치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대종사는 선과 악을 초월한 자리를 지선이라고 말씀한다. 선과 악을 초월한 자리란 선악이 없는 자리이면서도 선악에 대해 분별하거나 집착함이 없는 자리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크게 텅 빈 마음[大空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산종사는 성인들은 인(仁)과 자비와 사랑을 소유한 도덕의 주인이요 허공 법계의 주인이므로 크게 텅 빈 마음[大空心]과 크게 공변된 마음[大公心]으로 일체 생령을 구제하는데, 크게 텅 빈 마음에서 또한 크게 공변된 마음이 나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선의 자리에 그친다는 말은 성인의 두 마음을 본받아서 텅 빈 마음이 되어야 위대한 사랑과 자비와 지혜가 나와 큰 활동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에 재학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한 모든 사람이 국가의 지도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누구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영성과 역량을 개발[명명덕]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발전에 이바지[신민]하게 된다. 이를 단지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이 아니라 대공심(大空心)·대공심(大公心)의 지선의 자리에서 행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그곳의 지도자요, 세계주의자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대학』에서 말하는 대인의 학문으로서의 요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우리가 대학에 가는 이유였으면 좋겠다.


“대학에 가서『대학』을 제대로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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