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껴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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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껴안기
  • 이태은
  • 승인 2019.04.03 11:09
  • 호수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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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자연감수성 UP

초록 치마를 두른 이들이 나무를 껴안는다. 그들의 표정은 고통스럽고 슬프다. 또 다른 이들의 손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숲이에요’라는 종이 팻말이 들려 있다. 250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참여해 만든 ‘나무얼굴’ 현수막에는 잘려나갈 운명에 처한 나무들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비자림로를 슬프게 응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름다운 경관도로’ 조성이라는 이름의 비자림로 확·포장 공사장에서는 공사재개 하루 만에 300여 그루의 삼나무가 잘려나간 것으로 보도됐다. 박스를 잘라 만든 손팻말을 든 여성들은 전기톱을 든 사내의 거친 톱질을 온몸으로 막아서며 “그만하세요. 제발”이라는 신음과 같은 울음을 내뱉는다. 2천여 그루의 나무가 이렇게 베어질 예정이다.

이미 제주도는 지난해 8월 구좌읍 대천교차로에서 송당리로 이어지는 비자림로 2.94km 구간을 왕복 2차선에서 4차선으로 넓히는 확·포장 공사를 추진하면서 삼나무 1,000여 그루를 베어냈다. 난개발과 환경 훼손 등을 우려한 빗발치는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7개월간 중단됐던 공사가 지난 3월23일 재개되면서 ‘비자림로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시민들의 모임’ 소속 주민들이 달려와 나무를 껴안기 시작했다.

에코페미니스트이자 사회학자인 반다나 시바가 이끌었던 인도의 칩코(chipko)운동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기시감이다. 앞치마를 입은 인도여성들과 아이들이 나무를 껴안고 거대한 벌목자본에 맞섰던 칩코운동은, 1973년 인도 산림청과 대기업 이몬사에 맞선 고페쉬왈지역 여성들의 나무와 숲, 그리고 삶을 지켜내기 위한 저항운동이었다. 고페쉬왈 여성들은 벌목 대상이 된 나무를 감싸 안고 “나무를 베려면 내 등에 도끼질을 먼저 하라”고 소리치며 벌목을 막았다. 이 운동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쳐 1976년 36만 ha에 이르는 산림을 대상으로 10년 동안 벌목금지 명령을 이끌어냈다.

사업비 242억 원이 책정된 비자림로 확장공사의 이유는 통행량 증가로 인한 교통체증과 안전을 위한 주민숙원사업이라고 한다. 공사장 곳곳에는 공사재개 찬성 현수막이 나부낀다.

제주도 교통정보센터 통계정보에 따르면 공사 구간을 포함하는 대천동~송당사거리 상·하행선 일 평균 통행속도는 올해 1월1일~3월22일 단 하루도 빠짐없이 시속 50km/h를 웃돌며 ‘소통원활’을 기록했다.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넓혀 평균 시속을 10㎞/h를 높인다고 가정했을 때 단축되는 시간은 약 20초라고 한다. 20초 단축을 위해 30년생 나무 2천여 그루가 희생될 예정이다.

공사구간 2.9km를 지나면 다시 2차선도로로 좁아지면서 나타날 병목현상은 또 다른 교통체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럼 또다시 나무를 자르고 도로를 늘리고, 차량 속도를 높일 것인가?

비자림로 확장공사 구간 끝에는 백 가지 약초가 있다는 백약이오름 부근에서부터 성산읍 수산리까지, 아름다운 오름 군락과 수산곶자왈 그리고 광활한 초원지대인 수산평(수산벵듸)을 관통하는 금백조로가 이어진다.

‘오직 시인들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라는 글에서 작가 리처드 에이드리언 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지상에서 가장 늦게 등장한 풋내기 생물이다. 인간이 당장 내일 사라져버린다고 하더라도 어떤 생태계도 붕괴하거나 손상을 입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내일 나무들이 사라진다면 지구 전체는 엄청난 격변을 겪을 것이다. 개미도, 지렁이도, 흰개미도, 꿀벌도, 해초도, 곰팡이도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8천 년 동안의 인간 이야기를 제외하면 지구상에서 낮은 종에 속한다.”

제주 비자림로에서는 지상에서 가장 낮은 ‘종’이 20초 단축을 위해 나무를 잘라내고 있다.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어 숲을 가꿔야 할 이 봄날에 말이다.

/ 원불교환경연대

04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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