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교당 허의상 교도/ “내가 먼저 베풀어야 모두가 행복해”
상태바
영등포교당 허의상 교도/ “내가 먼저 베풀어야 모두가 행복해”
  • 강법진 편집장
  • 승인 2019.05.08 13:42
  • 호수 11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원의 향기


“행타원님이세요?”
약속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미리 나와 있는 한 어르신에게 다가갔다. 올해로 98세, 어떤 분이실까 궁금했는데 예상보다 ‘너무 곱다, 반듯하시다’. 기자에게 준다며 지팡이 하나 없이 배낭에 포도와 사탕을 가득 담아온 어르신.

특별히 아픈 곳은 없으나 지난해부터 귀가 멀어 큰 소리로 말해야 알아듣는다는 영등포교당 행타원(幸陀圓) 허의상 교도는 ‘내가 먼저 다가가고 내가 먼저 베풀어야 모두가 행복하다’는 이치를 깨닫고 지금도 그 표준으로 살고 있다. 원불교를 만나 스승의 은덕으로 살아왔다는 그는 아흔여덟의 노구에도 혼자서 버스를 타고 매주 법회에 나온다. 법회뿐이랴. 월초기도며 교당 행사에도 그가 빠지면 왠지 이상할 정도.

아침 새벽기도로 하루를 열고, 매일 1000주 염불과 법문 사경으로 하루를 마감한다는 그는 무시선 무처선의 활불 그 자체였다. 해방 직후 익산에서 원불교를 만나 군산-전주를 거쳐 지금의 영등포교당 교도가 되기까지 그는 가는 곳마다 스승과 도반들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자녀교화’다. 효자 효녀가 따로 없을 정도로 극진한 효를 다 하지만, 종교관에 있어서는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한창 대학 다닐 때 챙겨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일원상 선물하며 사제정의 맺은 발타원 정진숙 종사

98세, 행타원 허의상 교도

친한 언니의 소개로 입교한 그는, 진안이 고향이다. 어릴 적 마을의 지주였던 그의 부모는 곳간을 두 군데 마련해 놓고 한쪽은 가족을 위한 곡식을, 다른 한쪽은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든 빈민들에게 나눌 곡식을 쌓아놓았다. 심지어 어머니는 끼니를 얻으러 온 걸인이 변변치 않은 옷을 입고 있으면 입던 옷도 벗어줄 정도로 자비심이 깊었다.

자식 교육을 위해 온 가족이 전주로 이사 가던 날에는 마을이 울음바다가 됐다고. 그렇게 덕망 있고 베풀기를 좋아하던 부모의 그늘에서 자라서인지 그 또한 전주에서 살았던 40여 년 동안 사랑방처럼 집을 터놓고 살았다.

그 심법을 훤히 들여다보았는지, 입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를 당시 군산교당 교무였던 발타원 정진숙 종사가 무척이나 예뻐했다. 그때부터 그의 새벽기도가 시작됐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1년 만에 남편이 전주로 전근을 가야 했다.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울었다. 발타원 종사는 위로의 뜻으로 그에게 일원상 액자를 선물했다. 신성의 뿌리를 내린 그에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듬해 발타원 종사가 전주교당으로 부임 받아 오면서 다시 이어졌다.

“그때 주신 일원상 액자를 지금도 봉안하고 있어요. 그리고 대종사, 정산종사, 대산종사 옆에 발타원 스승님의 사진을 놓고 기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발타원님을 불러요. 평소에 저를 위해 늘 걱정해 주며, 천주(염주)를 선물해 줬는데 열반하는 모습을 못 봤어요. 그게 죄스럽고 한이에요”라고 눈물을 훔친다.

그 아쉬움에서인지 스승에 대한 그리움은 신앙의 바탕이 됐다. “퇴임을 하셨는데 대산종법사님의 특명으로 완도에 내려가 세계청소년센터를 만든다 그래요. 천 만원이 필요하다는데 걱정이 태산이었죠. 그때도 발타원님은 ‘부처님 사업은 시작만 하면 된다. 걱정 없다’고 했어요. 그러더니 이튿날 종로교당 교도들이 완도에 내려와서 그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1인 100만 원씩 10명이 기금을 모으기로 하고 바로 보내줬어요. 그때 부처님 사업은 시작만 하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죠.”

비록 젊은 시절에는 바쁜 남편 뒷바라지에 육남매를 키우느라 여력이 없었지만, 스승님의 그 말은 오랫동안 남아 후일 김화교당 법당 불사와 영등포교당 신축 불사에 힘을 보태는 계기가 됐다.
 

지팡이도 없이 버스를 타고 매주 법회에 참석한다. 
지팡이도 없이 버스를 타고 매주 법회에 참석한다. 

매일 기도하며 살아요

비록 자녀교화는 못했지만 그로 인해 친정어머니 안세심화 교도가 신실한 교도로 활동을 했고, 남편 김청공 교도는 3년 병환에 시달리면서 뒤늦게 입교해 불연을 맺었다. 바쁜 삶의 일터에서 물러나서야 교법을 알아본 남편은 말년에 아내의 지지자로 든든한 도반으로 함께 했던 것.

“딸들도 어릴 때는 손잡고 교당을 다녔죠. 그런데 대학 가면서 신앙이 갈리더라고요. 그래도 나에게는 참 잘해요. 나는 부모님에게 효를 다하지 못했는데…. 돌아보면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따라 선과 악, 죄와 복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마음공부로 죄 안 짓고 살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다만 어머니에게 불효한 것과 발타원님 발인식에 못 가본 것, 친구에게 직장 소개를 잘 못 해준 죄책감이 가슴에 남아 매일 기도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97년의 세월을 짧은 시간 동안 전하느라 그의 얼굴에는 찰나간에 웃음과 눈물, 그리고 스승님에 대한 그리움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5월 10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