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씨앗, 그것은 바로 열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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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씨앗, 그것은 바로 열등감
  • 이여진 교도
  • 승인 2019.06.05 15:15
  • 호수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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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며 말한다. “너의 오만함이, 그 오만한 옷들이 우리 사이를 이렇게 갈라놓았다.” “아닙니다. 제 옷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침장님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영화 ‘상의원’에서 궁중 최고의 한복 디자이너 어침장과 보잘것없는 바느질쟁이 공진이 마지막으로 주고받는 대화이다.

짐짓 모른척하고 있었지만 공진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실의 의복을 제작, 관리하던 관청 상의원. 그 상의원의 최고 수장인 어침장이 기생 옷 나부랭이나 만들어주고 밥술이나 얻어먹는 별 볼품없는 자신을 끝없이 시기 질투하고 있었다는 것을. 공진은 짧은 저고리 길이, 속곳이 드러나는 다소 남세스러운 치마를 만들어 궐 밖 기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궁궐에 들어와 어침장과 인연을 맺게 되고 궁중 의복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둘의 관계가 좋았던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의복은 모름지기 격조와 품위를 갖추고 계급이 드러나야 한다고 믿는 어침장과 입기 편하고 보기 예쁘면 그만이라는 공진은 옷에 대한 기본 철학부터 달랐다. 법도를 강조하는 궁중에서조차 규율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공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인, 관리, 중전, 심지어 임금까지도 그의 옷에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출신도 알 수 없는 비루한 공진 때문에 당대 최고라고 추앙받던 어침장은 스스로 한없이 초라해짐을 느낀다. 죽을힘을 다해 한 땀 한 땀 이루어놓은 그의 명예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모멸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결국 어침장의 분노는 자신의 못난 열등감을 숨긴 채, 공진을 세상이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악인으로 만들어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아가기에 이른다. 급기야 공진과 중전과의 염문이 퍼지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군왕은 공진의 참수를 명한다.

이제 어침장의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보란 듯이 공진이 만든 옷을 모조리 불살라 버린다. 그러다 우연히 옷 한 벌을 발견하게 된다. 중인 출신으로 30년 동안 왕실의 옷을 지어온 어침장이 이제 곧 양반으로 신분이 상승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그렇게까지 미워했던 어침장을 축하하기 위해 공진은 그의 옷을 몰래 지어 놓은 것이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만들었을 그를 생각하며, 처음 만나 함께 했던 그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어침장은 뒤늦은 참회로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공진의 머리는 이미 망나니의 칼날을 맞고 허공에서 무참히 떨어진 이후였다.

‘상의원’을 보는 내내 영화 ‘아마데우스’가 오버랩되어 생각났다.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와 그의 재능을 끝없이 시기하고 질투한 당대 최고의 궁중 악장 살리에리에 관한 영화 말이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껴 본 감정, 그것은 자신이 갖지 못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질투와 시기, 바로 열등감이다. 타고난 천재와는 달리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그 천재의 재능을 따라 갈 수 없어 끝없이 좌절하는 평범한 사람. 대부분의 우리는 후자에 속한다. 그래서 열등감에 빠져 못된 짓을 일삼는 어침장과 살리에리가 밉기도 하지만, 한편 그런 그들을 가여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 만약 그들이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장인으로서, 멋진 음악을 꿈꾸는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서로 공유하고 살아갔다면 어땠을까?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한길을 걸어가는 동지로서, 힘들 때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따뜻함, 말없이 바라보는 흐뭇한 눈빛만으로도 시너지 효과를 냈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 윈윈할 수 있는 행복한 파트너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상의원’에서 어침장과 공진이 보여준 그림 같은 장면에서처럼 말이다. 푸른 염색천이 마당 가득 널려져 있는 넓은 뜰에 둘이 나란히 앉아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리고 일상의 모든 고락을 함께할 것만 같은 뜨거운 동료애를 가슴에 품고 해를 마주한다. 은혜로운 시간을 평화롭게 맞이하면서….

혹 우리 곁에 또 다른 공진이나 모차르트가 있어 지금 내 마음이 요란하다면, 나의 저급한 열등감 때문에 그를 시기하고 증오하고 있다면, 그것이 결국 나를 옥죄고 황금같이 아까운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결국 나를 파멸케 하는 불행의 씨앗을 어리석게도 내 스스로 열심히 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6월 7일자]

 

이여진 교도(강남교당, 서울교사회장)
이여진 교도(강남교당, 서울교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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