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등뼈가 되는 일상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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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등뼈가 되는 일상의 기록
  • 김도경 교도
  • 승인 2019.06.14 14:07
  • 호수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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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손으로 생각하기. 지역의 작은 서점에서 노인층을 대상으로 열리는 생활예술 프로그램 제목이다. 기획의도는 감사일기 쓰기가 하루의 습관이 되고, 자신이 디자인한 나무 의자를 직접 만드는 목공 활동을 통해 손작업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손과 몸을 쓰며 사는 삶의 활력과 풍요로움을 글쓰기라는 기록의 과정을 통해 느끼고, 잠재된 나의 가치를 발견해가는 것이 목표다.

필자는 전체 과정 중 기록 습관을 위한 글쓰기 특강을 했다. 앞뒤로 진행되는 과정의 견인차 역할을 해야 했기에 고심했다. 시작을 어떻게 할까?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은 ‘낯설게 자기소개하기’였다. 빔 프로젝터로 진행되는 형식부터 낯설어하는 참가자들에게 필자를 소개한 후 메모지에 다섯 글자로 나를 표현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살아온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나를 표현해도 되고, 최근 한 달간의 나, 어제의 나, 오늘 서점에 오기까지의 나 혹은 살아갈 날들에 대한 바람을 담아 나를 표현하면 된다.

나 자신을 표현하는 다섯 글자를 기록하는 것은 예상했듯이 꽤 시간이 걸렸다. 직업이나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방식으로 진행했던 10대 청소년도 20~30대 젊은층도, 전문직 종사자들도 막상 제한된 다섯 글자로 자신을 표현하기란 익숙하지 않다. 짧은 순간 압축적으로 과거·현재·미래의 나를 생각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낯선 방식의 자기소개 과제에 참여한 어르신들은 너무나 진지하게 고심하며 못 쓰겠다고 했다. 이런 거 해 보지 않아서, 배운 게 많지 않아서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나는 요즘 이게 고민인데, 나는 앞으로 이런 모습으로 살고 싶은데, 그걸 다섯 글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참가자들에게서 어디서 어떻게 자신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위기가 너울처럼 일렁였다.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는 설명과 함께 예시 글자 중 하나인 ‘책빚갚는중’에 담긴 필자의 이야기를 사례로 들려드렸더니 ‘한 번 해 볼게요’ 하며 연필을 꼭 쥐고 조심스레 써 내려갔다. 이후 너무나 평범한 삶이라 말할 게 없다던 어르신들의 이야기와 눈물, 웃음은 작은 서점을 가득 채웠고 예정된 시간을 30분이나 훌쩍 넘겼다.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역사나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이자 특권이다. 자신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은 살아내며 마주친 수많은 생과 사의 기로에서 비롯된 압도적인 핏빛 사실을 등뼈 삼아 정직한 묵상으로 손끝으로 빚어낼 수 있는 행위가 아닐까. 가만히 있으면 기억은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사라져버릴 것 같다. 주체로서의 내 삶의 중요한 순간을 붙잡아두는 데에는 감각 경험을 기록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단어로 단순히 나열하는 것을 넘어 나의 선택과 생각이라는 선별 과정이 작동될 때 내 삶의 소중한 이야기는 빠져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등뼈를 곧추세우듯 기록되는 삶으로 나를 다시 존재하게 할 것이다. 일상의 기록은 삶의 가치를 되묻는 작업으로 선순환된다.

반드시 완결된 형태가 아니어도 되고, 대단히 드라마틱한 사연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손으로 생각하는 기록의 과정을 통해 잰걸음으로 종종거리는 발걸음을 느리게 걷고, 앞만 보던 시선을 옆을 살피게 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 옆에는 누가 있는지, 어떤 삶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며 인생의 기록 그 자체로 자신을 강건하게 할 것이기에.

6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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