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냉혹한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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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냉혹한 유희
  • 김도경 교도
  • 승인 2019.07.10 00:45
  • 호수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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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얼마 전 지인에게서 전달받은 글을 읽으며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글쓴이는 개인이 운영하는 SNS에서 조회 수가 1만 번이 넘은 것을 기념한다며 유명 연재 플랫폼에 옮겨와 내용을 추가 보강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용은 최근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 유명 톱스타 커플의 성격유형을 에니어그램(Enneagram)을 도구로 분석한 글이었다.

쏟아져 나오는 관련 보도와 예전 인터뷰 부분을 발췌하여 헤어지는 커플의 성격유형을 추정한 글이었다. 성격의 부정적 측면을 설명하는 부분에선 ‘약물복용, 극단적 선택, 허무주의, 불건강’ 등의 민감한 표현도 있었다. 가장 눈살이 찌푸려졌던 것은 ‘차후 000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어떤 유형일까’라며 두 사람에게 향후 어울리는 각각의 성격유형을 추천한 부분이었다.

관련 일을 하는 종사자가 유명인의 성격유형을 추정 분석하여 자신의 SNS에 게재하는 경우들은 있다. 그러나,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의 관심을 동력 삼아 살아가는 공인이라 할지라도 매우 고통스러운 사건을 현재 겪고 있는 당사자가 아닌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일말의 안타까움이나 최소한의 예의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글의 맥락과 의도로 볼 때 문제의식을 느끼며 적절하지 않은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소감을 회신했다. 성격유형을 알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선한 의도로 전달해준 지인에게 필자의 반응은 적잖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주관적인 성격유형을 아는 것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품격이 아닐까.

발표가 나자 이틀간 포털에 쏟아진 기사만 3,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진료 대기 중 대형 TV를 통해 본 연예 이슈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은 눈을 유독 반짝거리며 검증되지 않은 누더기 같은 루머들을 덧보태기 바빴다. 부러 기사를 찾아보지 않아도 들리고, 보이는 것만으로도 한 언론사 기사의 제목처럼 ‘우리’는 남의 아픔을 두고 ‘클릭’ 장사를 하며 언론이라는 이름의 포장 아래 참담함을 보았다. 어서 이 기사를 클릭하여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라는 냉혹한 유희의 손짓에 당사자들의 고통은 증폭되고 불특정 대중의 불쾌지수는 높아지고 있다. 타인의 고통을 마케팅의 소재로 삼아 부추기는 일부 미디어와 관음증적으로 소비하는 대중의 냉혹한 유희가 섬뜩하게 느껴진다.

세속을 사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누구나 부딪히는 반복적인 삶의 문제를 만나게 된다. 타인의 시련에 대해 함부로 타자화, 단순화 시키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보통 타인의 기쁨과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고 믿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은 자기 생각만큼 깊거나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이 글 또한 또 하나의 유희로서의 텍스트가 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며 글을 썼다.

<대종경> 인도품 35장으로 마무리한다. “하루는 여러 제자들이 신문을 보다가 시사(時事)에 대하여 가부 평론함이 분분하거늘,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어찌 남의 일에 대하여 함부로 말을 하는가. 참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남의 시비를 가벼이 말하지 아니하나니라. 신문을 본다 하여도 그 가운데에서 선악의 원인과 그 결과 여하를 자상히 살펴서 나의 앞 길에 거울을 삼는 것이 공부인의 떳떳한 행실이요, 참된 이익을 얻는 길이니, 이것이 곧 모든 법을 통해다가 한 마음을 밝히는 일이라, 이러한 정신으로 신문을 보는 사람은 신문이 곧 산 경전이 될 것이요, 혜복의 자료가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도리어 날카로운 소견과 가벼운 입을 놀려 사람의 시비 평론하는 재주만 늘어서 죄의 구렁에 빠지기 쉽나니 그대들은 이에 크게 주의하라.”

7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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