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와 기업의 경영마인드
상태바
종교계와 기업의 경영마인드
  • 손승조 교도
  • 승인 2019.07.17 01:53
  • 호수 11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기고 Ⅱ/ 가락교당 손승조 교도

2010년 5월 25일, 은덕문화원에서는 당시 서울대 경영학과 조동성 교수의 ‘21세기를 위한 경영학’이라는 주제로 소태산 아카데미 강연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전체 강연 내용은 희미하지만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구절이 있다. “종교계에서도 경영마인드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종교계와 기업경영, 무언가 연결고리가 없을 것 같은 두 영역이 만나는 곳에는 바로 ‘사람’이 있다고 했다.

옛날 성장일로에 있었던 90년대까지도 시장은 ‘셀러즈 마켓(Seller’s Market)’이었다. 만들기만 하면 팔리던 시장의 활황은 고도의 경제성장과 과거의 인구폭발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지금은 ‘바이어즈 마켓(Buyer’s Market)’ 즉 고객의 입맛에 따라 간택을 받는 시장이다. 그만큼 공급에서는 경쟁이 뜨거운 반면 수요는 까다로워지고, 경제활동 인구뿐만이 아니라 전체 인구수 자체가 크게 줄어들고 경제상황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여기에 기업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계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우려하던 현상이다.

기업은 망하면 사라진다. 살아남기 위하여 기업들은 가히 필사적으로 노력을 한다. 그 기업의 노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업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사업은 회사명이나 정관, 설립 취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객이 재화나 서비스를 구입함으로써 어떻게 만족을 느끼도록 할 것인가에 의해서 항상 정의된다. 그리고 경영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는 ‘우리의 고객은 누구인가’, 즉 고객의 가치, 기대, 현실, 상황, 행동을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사업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을 찾는 첫걸음이라고 그의 저서인 <매니지먼트(Management)> 첫머리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 ‘보통 기업들은 매니지먼트가 곤경에 처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본질적 질문을 잊고 지내기가 쉽다. 하지만 결국 어려움에 빠졌을 때 제일 먼저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회복불능으로 보이는 기업조차도 호전시키며, 눈부신 성장을 이끌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고 역설하면서 오히려 이 질문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 우리도 이 본질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의 사업은 무엇인가, 우리의 고객은 누구인가’. 이러한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교화대불공의 답을 찾는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정전> 총서편 ‘개교의 동기’와 ‘교법의 총설’에서 우리의 ‘사업의 목적과 사명’에 대해, 그리고 사업의 대상인 ‘고객’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의 고객은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이며, 이 고객들로 하여금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고 사은과 삼학을 그 강령으로 하여,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서 그 고객들을 ‘파란고해로부터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 하는 것이 우리 사업의 목적이자 사명이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과 사명은 마케팅 관점에서 보면 ‘교단 중심적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기업이 망하지 않고 그 존재를 지속하기 위한 칼자루는 결국 고객이 쥐고 있다. 고객이야말로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판단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기업은 끊임없이 고객을 유지하고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 기업이 가져야 할 도구가 바로 마케팅과 혁신이다. 이전의 기업 마케팅은, 생산 제품과 판매 시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이제는 고객의 현실, 욕구, 가치에서 출발해야 한다. ‘고객에게 무엇을 팔고 싶은가’가 아니라 ‘고객이 무엇을 사고 싶어 하는가, 고객이 가치를 느끼고 필요로 하며 찾고 있는 만족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고객 중심적 관점’이다. 우리는 ‘교단 중심적 관점’을 ‘고객 중심적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 일체생령들을 파란고해에서 구하여 광대무량한 낙원세계로 인도하겠다는 관점을 돌려, 현대 물질문명 속에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간절히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 그것을 찾아내어 안겨 주는 것이야말로 교화대불공의 시작이자 끝이다. (다음호에 계속)

7월19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